영원히 볼 수 없다고 해도

맹점

by미지의 세계

"너 편지 왔더라."


어느 날 퇴근하니 남편이 식탁 위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웬 편지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속도위반 딱지였다. 악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허둥지둥 살펴보고 있자니 남편은 이미 훑어봤단 듯 덤덤하게 덧붙였다.


"아마 출근길에 찍혔나 보던데? 앞으로 내비게이션 소리를 더 키워서 다녀봐."



시골로 이사 오고 나니 출, 퇴근 때마다 5개의 시, 군 국도길을 통과한다. 시간으로 따지면 왕복 2시간 30분가량 걸리는 길이다. 그러다 보니 속도 제한 카메라도 꽤 많이 지나치는데, 지난번에 얼핏 세어보니 15개 이상 되는 것 같았다. 보통은 제한속도 80km/h이 기본이지만, 어르신들 많은 마을을 지날 땐 70km/h나, 60km/h 이하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 곳도 있다.


처음엔 그 모든 걸 잘 피해 다녔는데, 이젠 익숙해지니 간혹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채 사진에 찍히곤 한다.​ 억울한 마음이야 있지만 정해진 속도를 지키지 못한 일이니 남탓할 것도 없다. 과태료를 내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니라'는 죽비 세례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길에서 자꾸 속도 카메라를 놓치는 것, 이것은 '맹점'의 원리와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맹점이란 눈에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영역을 뇌가 주변 정보를 이용해 채워 넣는 것이다. 요즘은 AI를 이용하면 사진 속 빈 공간쯤 주변과 비슷하게 맞추는 게 어렵지 않지만, 과거엔 포토샵으로 그걸 잘 해내는 것도 기술이었다. 컴퓨터로 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지만 사실 우리 뇌는 맹점을 처리하는 방식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을 할 수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렇게 익숙한 길을 가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도, 지나쳐지지 않기도 한 것이 있다. 로드 킬 동물들의 잔해들이다. 이미 죽은 동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 위를 그대로 지나가는 건 아직 힘들다. 반사적으로 운전대를 틀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아무 차도 없을 땐 기꺼이 잔해를 피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잔해를 밟는다. "미안해...." 하며 울고 싶은 심정으로 핸들만 꽉 잡는다. 고양이였던, 강아지였던, 또 노루였던 무언가를 밟고 갈 때마다 내 마음에서도 무언가 우지끈 부러지는 기분이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길에서 죽은 동물들을 많이 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 일인 것 같다. 어릴 적 시골에 계신 외할아버지 댁에 갈 때는 제법 긴 시간 고속도로와 국도를 지나다녔음에도 말이다.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도 더 많은 죽음들이 길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지가 됐든, 아니면 싸워야 할 지루함이 너무 컸든 아버지 차에 탔을 땐 그런 죽음에 대해 목격한 적이 없다. 그저 노래를 부르고 끝말잇기를 했던 기억만 있다. 이렇듯 사람에게 맹점이란 단순히 익숙해졌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닌 것 같다. 있는 줄도 몰랐던 맹점은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나서야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아이들과 어느 과학관에 갔다가 로드킬에 대한 전시를 봤다. 차도를 구현해 놓은 공간에 동물들이, 물론 전시장에 맞게 어느 정도 정돈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갔다.


"와, 여기 고양이다!"

"엄마, 여기 고라니는 잠자고 있는 거예요?"


순간 고민했다. 아이들이 죽음을 아나? 혹시 이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로드킬은 너무 어렵고 무서운 건 아닐까? 하지만 벌어지는 현실을 단순히 외면하는 게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표현을 고민하며 신중히 답했다.


"자는 게 아니고 죽은 거야. 동물들이 원래 다니던 길 위로 사람들이 차도를 만들어서 차에 치였대. 아팠겠지? 그래서 어떤 길에는 동물들이 다니는 통로를 따로 만들어 주기도 해.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동물들만 다니는 길이 있는지 찾아보자."


나는 이런 시도가 맹점을 줄이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릴 적부터 길 위의 죽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아이들이라면, 지금의 우리보다 더 많은 생명체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생물학적인 맹점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무지해서 보지 못하는 부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므로, 잘 몰라서 보지 못하는 것만큼은 애써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자신과 관련 없는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평소 약자들을 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 유모차를 밀고 지하철에 타보려 하고서야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이동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점은 영원히 볼 수 없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시야에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을 수 있다.


다시 퇴근길, 길 옆에 자는 듯 누운 어떤 형체를 지나치며 생각한다. 최대한 더 많은 것까지 보려고 부지런히 눈을 돌리며 살고 싶다. 어떤 면은 영원히 볼 수 없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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