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과자에는 커피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서 올라오는 중이었다. 나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을 나서려다 문득 발길을 돌렸다. 어제저녁 먹다 남겨 둔 과자 통을 열어 부채모양 전병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왼손에는 쓰레기봉투를, 오른손에는 소중한 내 과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쓰레기봉투부터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과자 하나를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바삭함과 고소함에 나도 모르게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거울을 보며 양손을 신나게 흔들던 바로 그 순간. '앗!'
흥이 너무 과했던 걸까. 왼손에 쥐고 있던 남은 조각과 오른손에 든 전병이 서로 부딪치며 바닥으로 산산조각 떨어졌다. 혹여 누군가 타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들을 쓸어 모았다. 양쪽 귀퉁이를 묶어둔 10리터 쓰레기봉투 속으로 조각난 과자들을 집어넣었다. 딱 한입밖에 먹지 못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아무도 보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쓰레기 수거함에 봉투를 툭 던졌다. 입안에 여전히 아삭하고 달달한 과자 맛이 감돌았다. 그 느낌이 아까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가을 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내 코끝에도 쌉싸름한 커피 향을 살짝 흘리며 지나갔다. 나는 그 향을 맡자마자 관리실 옆 작은 카페, ‘꽃 담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꺾였던 내 흥과 발걸음에 ‘천 원의 행복’이라는 마법이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돌계단을 두 칸씩 가볍게 올라서는데, 아무도 없는 놀이터의 그네가 눈에 들어왔다. 그네 주위 바닥에 ‘안전주의’라고 써진 띠가 붙어있었다. 하늘 높이 오를 때 조심하라는 문구를 보니 누군가가 다쳤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그네 밑싣개에 엉덩이를 밀어 넣고 가뿐하게 하늘을 향해 발을 굴렀다. 그 반동에 신고 있던 오른쪽 슬리퍼가 날아갔다. 그래도 그네는 무심하게 나를 끌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즐거움에 취해 나도 모르게 숨겨 뒀던 괴성이 툭 튀어나왔다. 놀란 나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부터 이 놀이터까지, 온 세상이 나를 위해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더욱 힘차게 발을 굴렸다. 어제보다 높아진 하늘에 구름이 갖가지 모양으로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뭉게구름 사이로 얼마 전 번개처럼 만난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빈말은 할 줄 모른다던 ‘추진력 만 볼트’로 온몸을 휘감은 그녀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온라인카지노에서 서로의 글을 읽으며 인연을 맺었다. 댓글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그녀가 글 속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살짝살짝 글 행간에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글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글 ‘빈말’에 내가 슬쩍 던진 댓글을 그녀가 덥석 물었다. 그게 어떤 색깔을 띤 낚싯바늘인지도 모른 채.
행복은 어떻게 보면 ‘헌 옷’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새 옷을 입으면 우선 기분이야 좋겠지만 뭔가 불편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헌 옷은 몸에도 맞을뿐더러 마음 역시 안온하고 편안해집니다. 이와 같이 행복은 헌 옷과 같이 소박한 곳에 있습니다.
이정하 『우리 사는 동안에』 중에서
수원과 순천의 중간지점을 찾아 우리는 전주역에서 만났다. 서로의 얼굴을 모르니 내가 빨간 장미를 들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보자마자 첫눈에 알아보았다. 나 원 참, 남녀 사이도 아니면서 떨리기까지 하다니. 그렇게 만 볼트 추진력의 그녀와 AA 건전지쯤 되는 내가 만났다. 온라인카지노에서 글을 쓰다가 진짜 온라인카지노를 먹은 셈이다.
글을 통해 이미 서로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처음 만났는데도 오랜 친구처럼 편안했다.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던 전주역마저 우리 덕에 환해지는 듯했다. 지붕을 때리던 거친 빗소리는 근사한 피아노 선율처럼 들려왔다. 우리는 글로 못다 썼던 이야기를 쉬지 않고 토해냈다. 고개 돌려 눈을 서너 번 정도 깜박거렸는데 세 시간이 지나갔다. 아직 풀지도 못한 이야기보따리가 입을 벌린 채 전주역 대합실 한쪽에서 기다렸는데….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서로의 입을 토닥거렸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곳에 남겨두고 온 빗방울 소리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내 가슴을 간지럽혔다.
나는 간질거리는 음에 맞춰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그네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붕 떠 있던 두 발을 푹신한 놀이터 바닥에 살포시 내렸다. 멀리 날아간 오른쪽 슬리퍼를 가지러 왼발로 콩콩 튀어갔다. 제짝을 찾은 슬리퍼를 끌고 카페로 걸어가며 맑고 푸른 하늘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내 곁으로 소박한 행복을 가지고 겁 없이 뛰어든 그녀에게 사진과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만날 인연이었나 봐요. Goodmorning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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