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리 속에 또 당신이
어제저녁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에 에어컨을 껐다. 앞뒤 모든 창문을 열어둔 채 잠이 들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떠지지 않은 눈을 힘들게 떴다. 시원하게 내리고 있는 빗소리였다. 안방 베란다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계곡에 온 듯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눈곱을 떼내며 두 손을 모아 창밖으로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동글동글 빗방울이 모이더니 금세 흥건해졌다. 불과 이삼 주 전만 해도 가뭄이라며 물 부족을 걱정했는데. 요 며칠 찔끔거리던 비가 오늘은 기분 좋을 만큼 세차게 내릴 모양이다. 필요할 때 내려주는 비가 반갑고 고마웠다. 내 손바닥에 모인 빗물이 아까워 조심히 화분 흙에 쏟았다. ‘꽃치자’라 백색 꽃이 핀다고 했는데 몇 년째 잎사귀만 무성한 미운 화분이다. 그래도 혹시 짭짤한 내 손맛이 담긴 빗물을 마셨으니 보란 듯이 꽃을 피울까?
빗소리에 취한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정문 쪽 온라인 게임인 쉼터 앞을 가득 채운 아이들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비옷과 장화를 갖춰 입고 보호자들과 함께였다. 그들 모습에 홀린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늘 앞만 보고 걷던 내 눈길이 아이들에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침부터 나를 깨운 건 요란한 빗소리였는데.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보다 아이들 목소리가 더 반갑고 감미로웠다. 마치 가을을 부르는 사랑 가득한 발라드 같다고나 할까. 빗소리에 괜스레 쓸쓸해지던 마음속으로 부드러운 음표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사거리 적색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검은 아스팔트 위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병아리들 노랫소리가 들릴 것 같은 노란색 어린이집 버스가 다가왔다. 차가 멈춰 서자 운전석 창문 옆으로 내 손바닥만 한 날개가 펴졌다. 빨간 바탕의 육각형 날개 안에 하얀색으로 ‘정지’라는 큰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버스 문 앞으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모여들었다. 그 소리와 함께 버스 출입문이 열렸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잡고 있던 어른의 손을 놓았다. 각자 자기 배꼽 위로 손을 올리며 버스에서 내리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어린이 여러분도 안녕”
아이들의 어눌한 발음과 비슷한 억양으로 선생님도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얼굴에 미소 가득한 선생님이 허리를 폈다. 두 손으로 아이들이 차례로 버스에 오르도록 도왔다.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창문에 코를 붙였다. 바깥에 서 있는 보호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창문 안팎에서 긴 시간 헤어지는 것처럼 서로에게 애절한 눈빛과 손짓을 보냈다.
오래전 어쩌다 한번 유치원 버스에 딸을 태우던 남편의 눈빛이 저랬다. 조선팔도에 하나뿐인 딸이니 안전하게 운전해 달라며 버스 창가를 떠나지 못하던 팔불출. 그럴 거면 직접 태워다 주지. 아! 맞아. 자신도 출근해야 했으니. 그게 걸림돌이었으리라.
아이들을 태운 노랑 버스가 떠나갔다. 귀여운 목소리들이 사라진 아스팔트 위로 다시 요란한 빗소리가 쏟아졌다. 버스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른들도 쏟아지는 비를 피해 하나둘 우산 속으로 사라졌다. 그곳에 혼자 남겨진 나는 길을 건널까 말까 하며 횡단보도를 멍하니 바라봤다.
당신만 생각하면 내 모든 사고가 흔들리곤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이미 다 지나가버린 일이야. 이렇게 나는 또 하루를 살았고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의 한 시기가 지나가고 있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고 믿지 않겠어. 나는 당신과는 다른 시간의 방향으로 어디론가 스며들고 있는 거야. 이제야 그걸 알았지. 그래,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야.
전경린 『식빵 굽는 시간』 중에서
신호등 불이 다시 바뀌었다. 비가 세차게 퍼붓는데도 검은 아스팔트는 무심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건너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는데, 자동차 한 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바퀴에 튕긴 빗물이 나를 적셨다. 옷에 묻은 빗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며 바삐 달려가는 차를 바라봤다. 운전자의 퉁명스러운 혼잣말이 들리는 듯했다. '출근길에 바빠 죽겠는데 왜 횡단보도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난리야!'
노랑 버스도, 바쁜 자동차들도 떠나간 거리는 빗소리만 남았다. 조금 전 장화 신은 아이들이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질러대던 기쁜 함성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 소리를 찾아 내가 빗방울이 튀어 오르는 도로 가운데로 뛰어들어 신나게 놀아볼까? 세상 풍파에 찌들 대로 찌든 비는 몸에 나쁘니 맞지 말라 했건만. 무거운 장우산은 던져버리고 빗속으로 달려가야겠다. 나와 다른 시간의 방향 어디론가 스며든 당신 손을 잡아끌면서. 그리고 즐거움에 외치는 함성 대신 당신 귀에만 슬며시 속삭여주련다.
내가 손바닥으로 흘려보낸 빗물이 화분 속 뿌리까지 닿을 시간 동안만이라도 이곳에 잠시 다녀가라고.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결국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 떨어지는 빗물이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블랙커피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왔다. 빗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공간에서 미련 없이 8월 달력을 넘겼다. 그때 베란다 화분 쪽에서 잎사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내 손바닥에서 흘러들어 간 빗물이 화분 속 뿌리에게 작은 기쁨이 되었나 보다. 빗소리에 맞춰 그것들이 내 지르는 함성이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해 온 쓸쓸하고 적적한 9월. 하지만, 반갑고 고마운 빗물을 먹은 오늘. 나를 위해 어쩌면 숨기고 있던 백색 꽃을 피울지도 모르겠다. 아주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를 풍기면서. 나는 빗물에 젖은 손으로 푸른 잎사귀를 만지며 '기다릴게'라고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