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을 데리고 온 아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행복한 선물

by김광희

도서관에 가려고 아침부터 바빴다. 10시 전에 집을 나서지 않으면 오늘도 나무늘보가 될 판이다. 거실 바닥이 아침부터 반짝이는 건 어제 종일 뒹굴던 내 등짝이 한 일이다. 외출을 준비하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블라인드도 들썩거렸다.


2주 전 흰머리 염색을 했건만 듬성듬성 서리가 내렸다. 이제 가을인데 벌써 겨울을 그리워하는 머리카락 색깔 때문에 거울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틀 만에 현관 밖을 나서는 길이니 당연했다. 손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비췄다. 휑한 정수리를 제법 솜씨 있게 덮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거울을 바라봤다. 아차! 입술을 빼먹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립스틱 바르는 걸 잊은 거다. 가방에서 립스틱을 빼 얼른 발랐다. 1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치원생쯤 되는 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올라탔다. 눈을 맞춘 아이에게는 미소로, 고개 숙인 엄마와는 입으로만 인사했다.


거울로 다시 고개를 돌리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엄마 뒤로 숨었다. 당황한 나는 ‘정수리 머리를 너무 높이 올려 닭벼슬 같아서인가?’라는 생각에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그 정도는 아닌데. 조금 솟아오르긴 했지만 아이 엄마와 별다를 게 없는 스타일인데….


아이가 엄마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며 나를 흘깃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엄마가 ‘왜 그래?’하며 아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엄마 귀에 웅얼웅얼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나는 일부러 무심한 척 엘리베이터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인 나에게 아이 엄마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놀란 나는 발개진 얼굴을 들었다. 셋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 아들 기억 안 나세요?”

아이가 엄마 등 뒤로 다시 숨었다. 내가 ‘아니, 무슨?’이라며 엄마 팔 사이로 보이는 아이 눈을 바라봤다.


어렸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어른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 또한 그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우리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루빨리 그런 존재들이 되기를 갈망했다. 우리에게 어른은 독립을 의미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공동 현관 앞까지 아이 엄마 이야기가 이어졌다. 등 뒤에 숨었던 아이가 엄마 손을 흔들며 나에게 모습을 보여줬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부딪쳐 반짝거리는 가을볕 같았다.


지난 2월 엘리베이터를 흥건하게 적셨던 아이였다. 온몸을 배배 꼬며 소변을 참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한데 얼굴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에 만나면 환하게 웃어주려고 했는데. 이놈의 나이가 문제인 건지, 내 기억력이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


아이 엄마는 그날 집으로 들어온 아이가 울면서 했던 말 중 ‘아줌마가 있었어.’만 생각난다고 했다. 아이를 씻겨주고 저녁을 준 후 엘리베이터를 닦으러 갔는데 깨끗해서 놀랐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제야 아이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아이를 따라 입을 크게 벌렸다. 어른인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감사 인사까지 하는 녀석이 예뻤다.


“치과 잘 다녀와. 다음에 만나면 아줌마랑 맛있는 것 먹자.”


나는 엄마 손을 잡고 해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아이 뒷모습에 눈길을 뺏겼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 머리를 쓰다듬은 내 오른쪽 손과 가슴이 점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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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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