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를 꿈꾸는 가시내

독립은 개뿔

by김광희

지난 5월.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짧았던 봄. 복숭아 농장 집 딸이지만 털 알레르기가 있는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흰색과 보라색, 자주색으로 풍성했던 목련꽃이 진 목련 숲에서 춤을 췄다. 그날 점심으로 먹었던 김치찌개 냄새가 휑한 숲을 채우며 우리 둘을 여고 시절로 데려갔다. 두 손을 맞잡고 서너 바퀴쯤 돌았을까. 친구는 "이제 우리 자주 만나자."라며 콧물을 들이마셨다.


그날 이후 콧물까지 들이마시던 친구와 나는 잠깐 봤을 뿐. 주로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았다. 20대 초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친구는 바빴다. 퇴직한 남편과 친정 식구들 틈에서 외출이 쉽지 않다는 넋두리를 나는 그냥 들어줬다. 전화를 끊을 때 면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우린 시간이 넉넉할 때 보자." 삐친 건 아니고. 나도 나름 바쁜 사람이니깐.


그리고 어느덧 8월 말이 되었다. 울먹이느라 들이마셨던 콧물이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을 시간인 어제. 친구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하필이면 왜 그곳에서 봐야 하냐고 묻는 나에게 친구는 만날 시간만 달랑 알려주고 끊어버렸다. '가시내. 평소답지 않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다니. 야를 만나 말아.'


가을인가 싶다가도 다시 뜨거운 열기로 솟아오르는 날씨 앞에, 끓어오르던 내 마음도 결국 무릎을 꿇었다.


옷을 벗고 유리문을 밀며 들어섰다. 문 맞은편 불투명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발가벗은 여자들이 물속을 걷고 있었다. 그 앞 사각형 탕에 양팔을 옆으로 뻗고 들어앉아 있던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조직폭력배들이 나오는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장면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얼른 손으로 가렸다. 나는 샤워기 앞에서 몸을 씻은 후 검은 조직의 형님을 모시는 오른팔처럼 굽신거리며 탕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서로를 언니, 동생이라 불렀다. 그리고는 냉커피를 나눠마시면서 냉탕과 온탕을. 사우나와 냉탕을 오고 갔다. 커다란 목소리에 주눅이 든 친구는 내 귀에 속삭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겨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고. 떠나기 전에 발가벗고 같이 목욕 한번 하고 싶었다고. 결혼 후 다시 만난 장소가 목욕탕이란 걸 기억하는 나와 친구는 뜨거운 탕 안에서 웃었다.


이젠 덥다며 나가자는 친구의 말에 나도 일어섰다. 내 몸을 흩던 친구의 시선이 복부 수술 흉터에 머물렀다. "너 배 왜 그래?"


지난봄.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우울증을 데리고 귀향했다는 친구에게 나는 소소한 나의 아픔과 변화를 말하지 않았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몇 년 만에 만나 건강해서 좋겠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굳이 아픔을 꺼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믿고 사는 것도 어쩌면 신이 내린 축복일 테니까.


너무 들떠서 밝게만 살 수는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어두운 면만 생각하고 스스로를 검은 성안에 가둬둘 필요도 없다. ‘그래 내 주위엔 좋은 사람, 재미있는 일도 많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울증을 없애주는 마음의 리모컨이다. 이 리모컨만 잘 조종하면 하루하루를 텔레비전의 특집 프로처럼 화사하게 보낼 수 있다.


유인경 『내 인생 내가 연출하며 산다』 중에서


깊은 우물 안이 캄캄한 탓에 그곳 벽에 붙어사는 개구리는 오래 산다고 한다. 다만 눈이 퇴화할 뿐. 친구가 말하는 삶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 살다 보니 세상이 안전하지만, 너무 갑갑하다고. 우물 밖으로 뛰어나오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이제는 노화가 시작되어 아무것도 못 하겠노라고.


아니라고, 친구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늘 ‘인형의 집 노라’를 꿈꿨다면서. 그래서 가장인 네가 힘들어 보였지만 부러워 훔치고 싶었단다. 느닷없이 배부른 고백을 받은 나는 친구 손을 잡고 근처 카페로 갔다. 사람 사는 세상에 뭐 특별난 게 있겠냐는 말부터 시작해, 랩을 하듯 속사포로 쏘아댔다. 나는 내 자리에서 그냥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그랬더니 그냥 살아지더라고. 늘 웃는 건 집안 내력일 뿐이고, 남편 그늘에서 뒹구는 네가 오히려 부럽다고.


마늘빵을 입으로 넣던 친구는 기름 묻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해" 가당치 않은 고백을 또 받은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음 주 서울로 떠난다는 친구에게 나도 그동안 품었던 고백을 건넸다. 나 매주 글을 쓰고 있다고. '온라인카지노 스토리' 앱을 보여주며 그곳에 오면 너에 관한 이야기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남편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지금, 잊고 지냈던 활자부터 다시 챙겨보자고 권했다.


그러자 친구는 마늘빵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툭 쳤다. 자신은 독립의 첫 단계로 스마트폰에 주식 앱을 깔았으니 당분간은 빨간 불, 파란 불에만 몰입할 예정이란다. 혹시 내 이름으로 바카라이 출간되면 주식으로 번 모든 돈을 털어 사주겠다나 뭐라나. 가시내, 말이나 못 하면!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빵을 씹느라 오물거리는 친구 입을 때렸다.


자기 할 말만 쏟고 싶어 아침부터 목욕탕으로 불러낸 친구가 괘씸해졌다.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몰았다. 가자미눈을 하고 친구를 째려보며 무섭게 말했다.


“독립은 아무나 하냐! 이렇게 글자를 무시하는 네가? 넌 그냥 그대로 우물 안에 있어. 독립은 개뿔! 가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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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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