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적 승리와 기묘한 환호

byAltusSolum

기형적 승리와 기묘한 환호 :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최근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지면들은 하나의 기묘하고도 불길한 결론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마이클 벡클리(Michael Beckley)와 할 브랜즈(Hal Brands)는 현재의 세계를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Heartland)의 권위주의 연대와 해양(Rimland) 자유주의 세력 간의 거대한 패권 전쟁으로 진단했다. 토머스 라이트(Thomas Wright)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국장 역시 중·러·북이 형성한 '비공식적 축(Axis)'이 과거의 어떤 동맹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정박(Jung H. Pak)과 빅터 차(Victor Cha) 등 안보 석학들의 진단도 궤를 같이한다.


이 거대한 충돌의 한복판에서, 북한은 더 이상 비핵화 회담장 주변을 맴도는 고립된 '은둔의 빈민(Pariah)'이 아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단층을 파고들어 전례 없는 물리적 레버리지를 창출했고, 유라시아 대륙 세력의 가장 호전적인 핵심 전위대로 격상된 것 처럼 보인다. 우리가 ‘도덕적유토피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철저하게 카와 모겐소가 말한 '권력 정치(Power Politics)'의 공식대로 움직여 쟁취한 기형적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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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이기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북한이 현실주의적 계산표를 들고 강대국들의 패권 전쟁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생존 공간을 넓히고 있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대한민국은 우물 안 개구리들처럼, 이 작은 공간에 갇혀 똑같은 사람들끼리 서로가 더 잘났다고 혹은 못났다고 싸우는데 매몰되어 국력을 탕진하고 있다.


국가를 피 흘리지 않고 붕괴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방법은 적의 내분을 유도해 스스로 힘을 고갈시키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고대부터 증명된 권력 정치의 가장 오래된 공식이다. 로마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통치했던 근간 전략인 '분할하여 지배하라(Divide et impera)'는 이 냉혹한 권력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가장 완벽한 선언이다. 이러한 기만술은 고대 그리스 시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패권을 두고 맹렬히 싸울 때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 티사페르네스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양측이 치열하게 내전을 이어가도록 번갈아 자금을 지원하며 그리스 전체가 자멸하기만을 기다렸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고 병서인 <손자병법> 역시 적의 결속을 끊는 '이간계'와 자중지란을 기다리는 '격안관화'를 싸우지 않고 이기는 최상바카라으로 꼽았다.


동서양의 고대에서 완성된 이 치명적인 전략은 현대전의 교리로 완벽하게 계승되었다. 냉전 시기 러시아 KGB가 서방 자유주의 진영을 내부에서 붕괴시키기 위해 구사했던 '적극적 공작(Active Measures)'을 시작으로, 1999년 중국 인민해방군 장성들이 주창한 <초한전>의 '인지전(Cognitive Warfare)', 그리고 북한이 반세기 넘게 집요하게 진화시켜 온 '통일전선전술(남남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총알을 쏘는 대신, 타겟 국가의 국민들이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증오하고 물어뜯게 만듦으로써 방어할 힘을 내부에서부터 철저히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적들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이 오래된 공작의 과실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우물 안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동안, 그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우리의 자멸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이 참담한 자중지란 속에서도 현재의 기득권 주류는 여전히 낭만적인 '도덕적 유토피아'에 취해 있다. 상대는 핵탄두를 늘리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정조준하고 있는데, 우리는 선의와 대화라는 환상에 기대어 스스로 쥐고 있던 동맹의 핵심 억제력(연합훈련)마저 덜어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교를 바카라임지는 수장조차 방패가 해체되는 것을 수수방관했거나, 심지어 그 사실을 몰랐다고 당당히 변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알면서도 묵인한 '직무유기'이든, 정말 몰랐던 '무지'이든 그 무바카라임함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적이 강대국과 피와 무기를 섞으며 구조적 동맹을 결속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생명줄인 안보를 타국의 선의에 내맡긴 채 스스로를 '종속 변수'로 전락시켰다.


□ 적의 칼날에 환호하는 '도착적 낭만주의'

그러나 이 모든 외교적 참사보다 더욱 참담하고 기이한 것은, 이 기형적 승리를 바라보는 우리 내부의 시선이다. 북한이 국제슬롯의 제재를 비웃으며 핵무력을 고도화하고 강대국들을 상대로 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이를 마치 '우리 민족의 자존'이나 우리의 성공이라도 되는 양 은근히 쾌감을 느끼고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오독을 넘어선 지적 비극이다. 그들이 환호하는 북한의 그 거대한 물리력과 무자비한 전략적 승리는 결국 서울을 겨냥한 서늘한 칼날이다. 우리의 목을 베기 위해 벼려진 적의 칼이 길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고 박수를 치는 이 도착적(Perverted)인 낭만주의는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이성의 마비인가? 아니면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현실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결과일까? 스스로의 생존 기반이 허물어지는 줄도 모르고 적의 승전보에 감정을 이입하는 집단에게 내일은 존재할 수 없다.


□ 찢어진 우산과 국가 이성(Raison d'État)의 회복

과거의 안일했던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제니퍼 린드(Jennifer Lind)와 대릴 프레스(Daryl G. Press)의 지적처럼 미국의 안보 공약은 다극화된 핵 위협 앞에서 이미 '찢어진 핵우산(The Broken Nuclear Umbrella)'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한반도의 지정학을 넘어, 새롭게 재편되는 '글로벌 오더(Global Order)'의 거대한 체스판을 직시해야 한다. 위태로운 대륙 세력의 팽창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환상 속의 페이스메이커나 유체이탈한 관찰자로 머물 수 없다. 다가올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 스스로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강대국들의 밀실 거래에 오르내리는 전리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적의 승리에 취해 현실을 잃어버린 이 도착적 낭만주의를 파괴하는 것, 그것만이 거대한 지각변동 속에서 이 위태로운 공화국을 지켜낼 유일한 선제적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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