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지배하는 시장 경제의 룰을 맹신해 왔다. 자산 가격은 △경제성장률, △물가, △부채비율, △고용 등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에 수렴하며, 유동성은 시장의 자연스러운 수요와 공급에 따라 흐른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매크로의 최전선부터 한국의 안방(부동산)에 이르기까지, 이 거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다.
국가가 시장의 룰을 강제로 부수고 가격과 유동성을 직접 통제하는 '보이는 손(Visible Hand)'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 펀더멘털의 죽음과 패권 전쟁: 미국은 왜 시장을 통제하는가?
이 거대한 전환의 신호탄은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재무부에서 쏘아 올려졌다.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미 재무장관은 최근 CNBC와의 인터뷰에서 40조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 부채와 국채 금리 급등을 두고 "현재의 수익률은 펀더멘털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We beileve that the yields don't reflect the underlying fundamentals.)"며 시장의 가격 결정력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재정적자 상황에 관해서는 많은 오보(a lot of misinformation)이 있다고 말하고, 시장(헤지펀드)의 오판에 대해 지적하면서는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People have bad information.)면서 나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비대칭 정보(I have asymmetric information)가 있다"며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직접 시장을 만들겠다(We are going to make a market in these.)"라며 국채 시장에 대한 대규모 직접 개입(바이백)을 시사했다.
<스콧 베센트 CNBC 인터뷰, 26.8.21>
https://youtu.be/KFrGapQZsSw?si=JN0HKr0TkO8nU9fr
이 발언이 지니는 파괴력은 다름아닌 '메신저'의 이력에서 나온다. 스콧 베센트가 누구인가? 1992년 9월 16일,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로 불리는 영국 파운드화를 폭락시키며, 영란은행(BoE)을 굴복시킨 주역중 하나다. 물론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스탠리 드러켄밀러(Stanley Druckenmiller)가 펀드의 주축이었지만, 당시 런던에서 실시간 대응과 현장지휘를 맡았던 사람이 베센트였다. 2013년 일본 엔화 약세에 베팅해 12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즉, 평생을 시장의 최전선(매크로 헤지펀드)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그가 이제는 재무장관으로서 시장을 향해 "너희들의 의도를 내가 모를 것 같나?(다 해본 나머지다!) 나에겐 너희가 모르는 비대칭 정보가 있다"고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글로벌 자본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느 지점에서 레버리지의 한계를 맞아 마진콜(Margin Call)을 겪는지 가장 직관적으로 꿰뚫고 있는 인물이 방패를 들었다는 뜻이다. 시장의 약점을 가장 예리하게 찔러본 자가, 이제는 그곳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수비수로 나선 셈이다.
과거 영국과 일본이 환율 방어에 실패했던 이유는 외환보유고의 고갈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 베센트가 쥐고 있는 카드는 무한대에 가까운 국채 발행 및 바이백(조기 상환) 권한을 가진 '기축통화국 미국'이라는 천하무적의 방패다. 더욱이 여기에는 '국가 안보'와 '미래 패권'이라는 중차대한 명분까지 더해져 있다. 그의 경고가 단순한 엄포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한 이유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스스로 정립해 온 자유 시장의 원리를 훼손하면서까지 금리를 억누르려(Yield Curve Control) 하는 것일까? 그 이면에는 중국과의 'AI 인프라 패권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중국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1.7%대라는 이례적인 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중국 테크 기업들이 사실상 공짜에 가까운 돈으로 거대한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을 깔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미국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4.5%를 맴돌고 있다. 만약 미국이 국가 부채를 핑계로 이 높은 금리를 방치한다면, 자본 조달 비용(Cost of Capital) 경쟁에서 밀려 미래의 기술 패권을 고스란히 뺏기게 된다.
결국 미 재무부의 개입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닌, 국가 안보를 위해 시장 금리를 강제로 낮추는 '전시 경제(War Economy) 체제'의 발동이다. 기축통화국이 빚을 갚고 금리를 통제하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면, 달러나 유로 같은 하드 커런시(Hard Currency, 기축·안전 통화)의 가치는 필연적으로 희석(Devaluation)된다. 글로벌 자본이 종이 화폐를 불신하고, 국가의 통제망 바깥에 존재하는 궁극의 실물 자산인 '금(Gold)'과 탈중앙화 자산 '비트코인(Bitcoin)'으로 자본이 피난을 가는 것은 이 '보이는 손'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인 것이다.
□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썰물이 된 외국인 자본
국가가 조작하는 매크로 환경은 글로벌 유동성의 거대한 역류를 만들어냈다. 미국과 일본의 정바카라 공조로 엔화 가치가 강제로 방어되면서, 값싼 엔화를 빌려 전 세계에 투자했던 '엔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 자본이 빚을 갚기 위해 신흥국 자산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사상 초유의 자본 유출로 증명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6년 외국인 증권투자자금 유출입 추이'를 보면, 사상 초유의 '-10,009.3억 달러(약 130조~140조 원) 순유출)'이라는 숫자를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한국은행 보도자료, 11쪽) 연준(FED)의 매파적 기조로 달러(DXY)는 강세를 보인 반면, 원화는 약세를 면치 못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앉아서 환손실을 보느니 한국 증시를 손절하고 탈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 증시가 빚을 청산하려는 글로벌 자본의 'ATM 기기'로 전락하며 자본 엑소더스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다가오는 국제정치의 11월의 '퍼펙트 스톰' 달력이다. 방어막 역할을 해야 할 △한·일 통화스왑이 11월 만기를 맞아 사전에 롤오버(연장)를 결정지어야 하며, △미국의 중간선거(11.3)와 △중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까지 11월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강대국들의 정치·외교적 셈법에 따라 통화스왑 연장이 흔들리거나 거시경제 변동성이 폭발한다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자본 유출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한국판 그림자 금융의 안락사: 전세 제도의 종말
태평양을 건너온 자본 유출의 파도는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를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다. 환율 방어를 위해 고금리가 강제되자, 가장 먼저 피를 흘린 것은 평범한 국민들이었다. 영끌족의 주담대와 서민들의 마이너스 통장 이자가 치솟으며, 가계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이다.
그리고 이 살인적인 고금리와 정부의 강력한 '대출 옥죄기'는 결국 한국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인 '부동산 전세 시장'의 목을 졸랐다.
한국의 전세 제도는 본질적으로 세입자가 은행에서 빌린 '전세자금대출'을 연료로 집주인이 갭투자를 감행하는 거대한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이다. 은행 대출의 문이 막히자 새로운 세입자들이 거액의 전세금을 끌어올 수 없게 되었고, 신규 유동성 유입이 끊기자 다음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보증금을 내주지 못하는 역전세 연쇄 부도가 뇌관을 터뜨렸다.
이 붕괴의 한복판에서 정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HUG(주택도시보증공사) 전세보증금 에스크로 도입' 논의다. 전세금을 집주인이 건드리지 못하게 묶어두겠다는 이 정바카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의 이사는 "새 세입자에게 받은 돈을, 당일 오전에 나가는 세입자에게 곧바로 송금해야만" 모두가 연쇄적으로 이사 갈 수 있는 '사다리 타기식 당일 정산' 구조이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 중간에 끼어 서류를 검토하느라 단 1시간만 돈줄이 묶여도 전국 이사 생태계가 마비된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제도를 수면 위로 올리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거시경제의 뇌관이 되어버린 전세 제도를 '의도적으로 안락사'시키겠다는 내심의 발로다. 가계대출을 억눌러 돈줄을 말리는 동시에 에스크로라는 불가능한 규제를 던져, 무한대의 레버리지를 창출하던 전세라는 폰지 구조를 서구형 월세 시장으로 강제 재편하려는 '한국판 보이는 손'의 개입인 것이다.
□ 누구를 위한 '손'인가, 위선과 폭력의 시대
△미국 재무부의 국채 시장 개입부터 △11월에 몰아칠 지정학적 폭풍, 그리고 △한국의 잔혹한 대출 옥죄기와 △전세 제도의 강제적 붕괴까지. 이 일련의 사건들은 위기를 감지한 국가가 어떻게 시장의 룰을 부수고, 그 모든 고통의 청구서를 평범한 자국민에게 떠넘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가는 '거시경제 건전성'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국민의 삶은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대체 누가 엄청난 이자를 감당하며 빚더미 위에 살고 싶어 하겠는가?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아버린 세상에서, 평범한 월급쟁이가 가족을 뉘일 보금자리를 마련할 유일한 방법은 '영끌 대출'과 '전세'라는 사금융뿐이었다. 그것은 투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정바카라 당국과 정치권의 행태는 어떠한가? 대장동 특혜로 수천억 원의 이권을 챙기고, 강남 핵심지의 부동산을 꿰차며, 정보의 비대칭을 이용해 주식 시장에서 부를 축적한다. 그러면서도 서민들이 평생 피땀 흘려 집 한 채 마련하려는 노력은 '악덕 갭투기'로 몰아세운다. 그들의 주식 투기는 자본주의의 미덕이고, 서민들의 부동산 구매는 국가 경제를 망치는 범죄인가?
정바카라은 오락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어제는 빚내서 집 사라고 규제를 풀더니, 오늘은 가계부채의 주범이라며 하루아침에 은행 문을 걸어 잠근다. 평생 한집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퇴직자들은 징벌적으로 폭등한 보유세와 건강보험료를 낼 돈이 없어 쫓겨나듯 짐을 싸고 있다. 정말 과연 이게 투기일까? 여기에 더해, 이제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전세 제도마저 '에스크로'라는 명분으로 박살 내려 하고 있다. 하나만 하라는 서민들의 절규는 철저히 무시된 채, 바카라임 없는 '보이는 손'이 서민들의 밥그릇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빚으로 빚을 돌려막으며 벼랑 끝에 선 국민에게, 각자도생을 강요하며 "부채를 줄이고 실물 자산을 사라"는 식의 조언은 오만한 기만일 뿐이다. 국가가 진정 '보이는 손'의 역할을 하려거든, 대출을 틀어막고 전세를 없애기 전에 기존 월세 시장의 폭등을 막을 확실하고 저렴한 주거 대안부터 내놓아야 한다. 대안 없는 시장의 파괴와 내로남불식의 위선적인 정바카라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묵묵히 버텨온 국민의 삶을 향한 폭력이다.
<한국은행 보도자료, 마지막 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