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에서는 아일랜드의 저명한 극작가 콜린 머피(Colin Murphy)가 투키디데스의 '멜로스 회담'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연극 <멜로스 침공(The Invasion of Melos)>의 낭독회와 안보 전문가 토론회가 열렸다. 이 학술 행사는 "지정학은 오직 이기심과 적자생존의 원리로만 작동하는가?", "외교에서 진정한 '현실주의(Realist)'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제국과 약소국의 대화가 오늘날의 국제 분쟁과 패권 경쟁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텍스트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금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마주한 외교적 현실을 냉혹하게 꿰뚫어 보는 투키디데스의 통찰이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외교 무대의 냉혹한 본질을 멜로스 회담을 통해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이치란 힘이 대등할 때나 정의를 논할 수 있는 법이며, 강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자신이 겪어야만 하는 것을 겪는다.(Right, as the world goes, is only in question between equals in power, while the strong do what they can and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 우리는 이미 19번(<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를 연재를 읽고) 글에서 이 문장과 38선이 그어지는 현장을 함께 살펴보았다.
https://blog.naver.com/altus_solum/224320563688
아테네의 함대 앞에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자주적 중립"을 외치던 작은 섬나라 멜로스는 결국 지도에서 지워졌다. 강대국이 들이미는 힘의 논리 앞에서, 고립된 약소국이 외치는 '독립'과 '자주'는 생존을 보장하는 방패가 아니라 스스로를 기만하는 환각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해방 공간의 한반도는 정확히 이 명제의 희생양이었다. 1945년 8월, 촌각을 다투던 강대국의 당혹스러운 우발성과 지독한 군사적 편의주의 속에 38선이 그어지던 그 결정적인 30분의 순간. 우리가 진정으로 뼈저리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미국 장교들의 무지함만이 아니다. 조국의 허리가 잘려 나가는 그 좁은 방 안에,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한 명의 한국인이 없었다는 참담한 사실이다. 국가가 주권적 역량을 상실했을 때, 그 참혹한 비용은 가장 취약한 민중의 피와 눈물로 지불된다는 냉혹한 진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또다시 기시감 넘치는 제국의 언어 앞에서 얄팍한 안일함에 빠져 있다. 최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방한하여 우리 정부를 향해 '독립자주노선 견지'와 '비진영화'를 훈계하듯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의 7월 기고문("China Is Sabotaging the World That Enables Its Rise")가 지적했듯, 이는 다극화된 국제 질서를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패권주의의 발로다.
https://www.foreignaffairs.com/china/china-sabotaging-world-enables-its-rise
중국이 우리 안방에서 요구한 '자주'는 진정한 주권의 존중이 아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제국주의 일본이 청나라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사냥감을 고립시키기 위해 조선에 강요했던 제1조 '자주국'의 수사처럼, 오늘날 중국이 말하는 자주는 한미동맹이라는 안보의 척추를 끊어내고 완벽히 고립되라는 억압적 주문이다. 1992년 수교 당시 합의한 '한반도 평화통일 지지'의 근본정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든든한 방패를 버리고 중국이 주도하는 수직적 질서 밑으로 들어오라는 기만극인 것이다.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이웃의 오만함 자체가 아니라, 그 수사적 기만 뒤에 숨겨진 독을 읽어내지 못하는, 혹은 읽어내고도 침묵하는 당국자들의 참담한 굴종이다. 1945년 38선이 그어지던 당시를 복기하며 우리는 종종 "그 좁은 방에 한국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조국의 허리가 잘리는 순간 결사적으로 반대 목소리라도 내지 않았겠는가"라는 서글픈 가정을 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라. 우리 외교 당국자들은 변방의 약소국이 아니라, 어엿한 주권국의 자격으로 상대국 외교부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우리 안방에서 주권을 농락하는 프레임을 짜고 양국의 수교 정신을 훼손할 때, 반박은 커녕 이를 그저 관례적인 수사나 평화를 위한 조언쯤으로 치부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심지어 회담 결과가 발표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뒤늦게 논란이 점화되는 이 기막힌 현실은, 작금의 외교 안테나가 얼마나 철저히 마비되어 있는지를 방증한다.
더욱 참담한 것은 이 치명적인 외교적 참사를 다루는 정치권과 엘리트 집단의 지독한 '뒷북'이다. 과거 한반도 현안을 다룬 외교관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조차, 회담 결과가 공식 발표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언론을 통해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막대한 국가적 권한을 누렸고 정부를 예리하게 견제해야 할 전문가 그룹이 현장의 최전선에서 주권 훼손을 실시간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사태가 벌어진 뒤에야 안전한 활자 위에서 평론가처럼 활극을 벌이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기만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예민한 역사적 촉수와 바카라임감을 보여주지 못하는 엘리트들의 직무 유기는, 안전한 무대 위에서만 작동하는 엘리트 정치의 공허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리에 없어서 항변조차 하지 못한 1945년의 '부재의 비극'과, 버젓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당사자의 면전에서 주권이 능욕당하는데도 비굴한 미소로 침묵하는 작금의 '현존의 희극' 중 과연 무엇이 더 뼈아프고 치명적인가? 단언컨대 후자가 훨씬 더 절망적이다. 전자가 힘을 잃고 식민 지배를 겪어야 했던 국가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한계였다면, 후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주권 국가의 자존마저 내던져버린 지독한 정신적 나태함이자 직무 유기이기 때문이다. 자리에 없어서 빼앗긴 권리는 훗날 힘을 길러 되찾을 명분이라도 남지만, 자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포기한 권리는 그 어떤 역사적 정당성도 구제받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1945년 당시보다 훨씬 더 첨예하고 치열해진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 한가운데 서 있다. 통제 불가능한 국제 정치의 우발성은 언제든 다시금 우리 운명을 뒤흔들 수 있다. 과거의 분단이 협상 테이블에 의자 하나 놓지 못한 '물리적 무능' 때문이었다면, 지금의 위기는 눈앞에 놓인 독이 든 잔을 축배로 착각하며 들이켜는 당국자들과 뒤늦게 빈말만 얹는 엘리트들의 '지적·도덕적 무능'에서 비롯되고 있다. 거짓된 자주의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 연대의 가치를 훼손하는 순간, 우리는 멜로스가 겪었던 참혹한 고립을 피할 수 없다. 진정한 자주는 오만한 패권국의 훈계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사후에 빈말을 얹는 것이 아니라, 냉엄한 국제 질서의 역학을 꿰뚫어 보고 굳건한 연대 속에서 우리의 핵심 이익을 타협 없이 지켜내는 실존적 당당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