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타기

byAltusSolum

지난 8월 22일, Altus Solum I 1번 글을 통해 미국 재무부의 국채 시장 개입부터 한국의 전세 시장 통제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가격과 유동성을 직접 쥐고 흔드는 <보이는 손(Visible Hand)>의 시대적 징후를 분석했다. 그리고 어제 워싱턴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정바카라적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미 재무장관이 이란을 겨냥한 '경제적 추방 작전(Operation Economic Outcast)'을 선언하고, 제3국 금융기관과 기업까지 포괄하는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 카드를 공식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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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금융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며 즉각적인 파국을 경고하는가 하면, 다른 일각에서는 '실효성 없는 엄포'라며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호들갑스러운 공포나 안일한 무관심이 아니라, 국제정치 주요 국가의 정치 일정과 금융 메커니즘이 맞물려 돌아가는 냉정한 구조를 직시하는 일이다.


□ 제재의 표면과 이면: 미중 정상회담을 향한 레버리지

미 재무부가 발표한 이번 조치는 △디지털 자산, △기술, △금, △항공, △해운 등 5대 섹터를 정밀 타격하고 있다. 그러나 발표의 디테일을 뜯어보면 흥미로운 전략적 완급 조절이 엿보인다. 베센트 장관은 "회색지대는 없다"며 달러 결제망 배제를 경고하면서도, 구체적인 마감 시한을 못 박지 않은 채 "상황을 정리하고 적응할 기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 발 물러섰다. 미 국무부의 루비오 장관 역시 동맹국들에 "당분간 추가적인 군사 타격은 없을 것"이라며 정바카라의 초점을 경제적 압박으로 전환했음을 전달했다.


이 기묘한 엇박자의 배경에는 두 가지 결정적 정치 일정이 자리 잡고 있다.

△ 9월 시진핑 주석 방미와 백악관에서 열릴 미·중 정상회담(현재는 9.24로 보도)과

△ 11월 미국의 중간선거다.


미국이 이란 원유의 90%를 수입하는 중국을 당장 SWIFT(달러 결제망)에서 쫓아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엄청나게 흔들리고,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유가가 폭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번 이란에 대한 '경제적 추방 작전'은 당장의 방아쇠라기보다, 9월 시진핑 주석과 마주 앉았을 때 가능한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무시무시한 '협상용 망치'(Leverage)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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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라고의 쵸콜릿 케이크

시진핑 주석 역시 트럼프의 이런 예측 불가능한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2017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은 플로리다 마라라고(Mar-a-Lago) 리조트로 시진핑을 초청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두 정상이 쵸콜릿 케이크를 디저트로 먹고 있을 때, 트럼프는 불쑥 "우리가 방금 시리아에 미사일을 쐈다"고 통보했다. 회담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정상회담 당일 상대의 우방(시리아)을 폭격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만술을 쓴 것이다. 이 '쵸콜릿 케이크'를 경험한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9월 회담을 앞두고 떨어지는 미국의 제재 압박이 결코 빈말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교훈은 명확하다. 미국과 중국은 겉으로는 관세를 때리고, 달러망 퇴출을 협박하며 피 터지게 싸우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파국을 막기 위해 철저히 물밑 백채널(Back-channel)을 가동하고 서로의 이해관계와 '룰'을 조율한다. 철저히 계산된 타이밍에 서로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고도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교'다.

□ 국익의 실종: 합의되지 않은 스탠스와 진퇴양난의 대한민국

반면, 국제정치 지정학 체스판에 끼어버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미·중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대화하고 룰을 세팅하는데, 정작 거대한 파고를 마주한 대한민국은 '무엇이 우리의 진짜 국익인가'에 대한 내부적 합의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다. 진짜 비극은 형식적인 소통의 유무가 아니라, 지금 정부가 취하고 있는 스탠스와 메시지가 과연 '대한민국의 국가적 명운과 실체적 생존'이라는 절대적 국익에 부합하느냐는 점이다.

현 정부는 나름대로 암암리에 외교 채널을 가동하고 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미중이 싸우는데 우리가 뭘 하겠냐며 무기력한 패배주의 뒤로 숨거나, 트럼프가 SNS에 김정은 사진을 올리며 과시하는 '브로맨스 쇼'를 보며 막연한 낙관론에 취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미국 대통령이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하노이를 벌써 잊었는가? 트럼프에게 김정은과의 사진은 중간선거를 앞둔 자국용 '홍보'다. 정치적 계산이 끝나면 언제든 다시 '화염과 분노'의 폭언을 쏟아내며 판을 엎을 수 있는 거래주의자다. 그런 인물의 변덕을 '안보'라 믿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외교가 아니라 무바카라임한 도박이다. 백채널과 기민한 외교는 패권국의 여유가 아니라, 틈새에 낀 자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쥐고 있어야 할 유일한 산소호흡기다.

당장 24~25일 타전된 보도를 보면 한국은 이미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관리를 위해 신설한 페르시아만해협청(PGSA)은 "통항 규정 위반"이라는 모호한 명분으로 유조선 45척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그 명단에는 국내 선박 5척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이란과 거래하면 달러망에서 쫓아내겠다'고 목을 조르고, 이란은 한국 선박을 볼모로 '해상 인질극'의 덫을 놓은 완벽한 진퇴양난의 국면이다.

밖에서는 기축통화국들이 금융과 에너지를 무기화하며 숨통을 죄어오는데, 안에서는 보여주기식 행정과 소모적인 갈등에 온 힘을 낭비하고 있다. 과연 호르무즈 해협의 위기를 타결하기 위해 어떤 백채널을 가동하고 어떻게 국익을 지켜낼 것인가? 설마 이것조차 "알아서 풀리겠지" 하며 양쪽 눈치만 살피다 당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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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줄타기의 준비물

강대국들이 타는 외줄에는 '기축통화'라는 안전그물과 '물밑 협상'이라는 정교한 균형봉이 쥐어져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국익에 대한 합의'라는 균형봉도 없이, 안대를 찬 채 강풍이 부는 허공의 외줄 위에 올라서 있다. 이 위험천만한 외줄타기에서 발생하는 거시적 불안정성의 대가는 고스란히 '안방의 붕괴'로 직결된다.

호르무즈 해협의 리스크가 장기화하고 미국의 '보이는 손'이 글로벌 유동성을 틀어쥐는 이상, 외국인 자본 유출과 고환율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를 가로막는 절대적인 족쇄가 되며, 결국 살인적인 실질 고금리의 장기화를 뜻한다.

외줄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 떨어져 피를 흘리는 것은 줄 위에 선 권력자나 정보의 비대칭으로 안전지대에 안착한 기득권층이 아니다. 오롯이 폭등한 이자와 전세 사다리의 붕괴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짐을 싸야 하는 평범한 국민들의 몫이다. 국가의 외교적 무능과 전략 부재가 낳은 청구서가 가장 약한 자들의 안방으로 날아드는 것, 이것이 바로 대화와 룰이 실종된 슬롯의 가장 잔혹한 폭력이다.

□ Open your Eyes! 눈 뜨고 균형잡기!

미국과 중국은 서로 다투는 것처럼 보여도 자국의 국익을 위해 1초도 쉬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심지어 전쟁중인 미국과 이란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조차도 물밑에서는 치열한 협상을 이어간다. 그 틈바구니에서 외줄을 탄 우리가, 바깥의 태풍은 보지 못한 채 안방에서 서로의 밥그릇을 탓하며 싸우고 있는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섣부른 감정적 분노도, 요행을 바라는 안일함도 아니다.

우리가 딛고 선 줄이 얼마나 얇은지, 그 아래 도사린 추락의 공포가 얼마나 깊은지 인정해야 한다.

외부의 태풍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 안의 방파제라도 단단히 다져야 하지 않을까?

외줄타기는 멈출 수 없다. 떨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안대를 벗고 눈을 뜨고, 균형을 잡는 것뿐이다.

<쵸콜렛 케이크 언론보도>

https://www.telegraph.co.uk/news/2017/04/13/donald-trumps-beautiful-chocolate-cake-really-does-look-rather/



<이란에 대한 경제적 추방 작전 관련>

https://www.axios.com/2026/08/25/rubio-iran-war-hormuz-oil

https://www.axios.com/2026/08/25/trump-iran-dday-secondary-sanctions-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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