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무대에서 '선의'와 '평화'라는 단어는 참으로 감미롭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걸린 벼랑 끝에서, 그 아름다운 단어들에만 기대어 서 있는 것만큼 위험하고 나태한 일은 없다. 최근 동맹의 핵심 억제력인 한미 연합훈련 축소를 두고 '대화를 위한 평화적 결단'이라며 찬사를 보내는 모습은, 국제정치학의 오랜 병폐인 '도덕적 유토피아(Moral Utopianism)'가 21세기 서울에서 부활한 참담한 실사판이다. 이 기형적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국제정치를 오독해 온 환상의 계보를 먼저 들춰봐야 한다.
□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니즘의 실패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자들은 △이성, △제도, 그리고 △도덕을 통해 영구적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국가 간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익 조화설(Harmony of Interests)'에 기대를 걸었던 시대였다.
국제연맹이나 전쟁포기조약(켈로그-브리앙 평화조약)처럼, 서명된 종이 문서가 적의 총구를 막아줄 것이라 착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창한 도덕과 평화라는 명분은, 실상 현상 유지(Status Quo)를 바라는 강대국들의 패권적 이익을 '보편적 선'으로 둔갑시켜 잔혹한 힘의 논리를 정당화 하는 도구로 전락하곤 했다.
□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없는
이들이 좇는 환상의 모순은, 아이러니하게도 500년 전 '유토피아(Utopia, 1516)'라는 단어를 최초로 창시한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원작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정작 이상 국가를 상상했던 모어조차, 국가의 생존과 안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도덕이나 선의가 아닌 '자본, 힘, 그리고 냉혹한 계산(현실주의)'만이 국가를 지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작 속 유토피아인들은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이웃 국가와의 조약은 어차피 이익이 엇갈리면 깨진다며 지독히 불신했다. 대신 평상시에도 남녀를 불문하고 가혹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압도적인 물리적 억제력을 유지했다. 심지어 전쟁이 발발하면 막대한 황금을 풀어 잔혹한 용병을 고용하고 적장의 목에 현상금을 거는 등 철저한 권력 정치의 민낯을 보여준다. 진정한 유토피아의 시민들조차 평화를 지키기 위해 검을 갈고 조약을 불신했는데, 21세기의 위정자들이 상상 속 유토피아인들보다 더 비현실적인 몽상에 빠져 있는 기막힌 역설이다.
□ 그 시절 '불온서적'을 들고 다니던 자들은 어디에?
이러한 낭만적 환상을 산산조각 낸 이가 바로 고전적 현실주의의 사상적 기틀을 닦은 E.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다. 그는 저서 <20년의 위기(The Twenty Years Crisis), 1939>를 통해 서구 도덕주의를 맹렬히 폭로하며, 국제 슬롯의 본질은 철저한 '힘의 역학(Power Politics)'임을 강조했다. 이 통찰은 훗날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 1904-1980)에게 계승되어, <국가 간의 정치(Politics Among Nations), 1948>에서 "국제정치는 본질적으로 권력 투쟁(Struggle for power)"이라는 고전적 현실주의 이론을 집대성하는 거대한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특히 E.H. 카는 한국 지성사에서 기묘한 위치를 차지한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1961>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을 담고 있다는 혐의로 이른바 '불온서적' 낙인이 찍혔지만, 당시 지식인을 자처하던 이들은 굴하지 않고 지하 서클에서 그의 바카라을 몰래 읽는 것을 일종의 '지적 훈장'이자 시대정신의 상징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여기서 지독한 역설과 마주한다. 그 시절 금서를 탐독했다며 자부심을 뽐내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정작 카가 그토록 경고했던 '도덕주의의 함정'과 '자유주의적 망상'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겉멋으로 바카라을 쥐었을 뿐인가 싶도록, "도덕과 선의는 위선이며 국제정치는 철저한 힘의 구조"라는 현실주의의 기초조차 읽어내지 못한 문해력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카의 경구는 표면적 수사에 휘둘리지 말고 역사를 추동하는 '힘과 구조'를 보라는 철학적 경고였으나, 이 땅의 낭만주의자들은 바카라의 제목만 암송한 채 현실에는 눈을 감아버린 듯 하다.
왼쪽 <역사란 무엇인가>의 표지는 화관을 쓴 외교관들과 만국기가 펄럭이는 평화로운 회의장을 묘사.
이는 조약서와 외교적 수사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던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도덕적 유토피아'를 완벽히 시각화/ 반면, 오른쪽 <20년의 위기>의 표지는 환상을 무참히 짓밟고 등장한 나치 군부의 차가운 행진을 담은 사진. 이는 도덕과 평화라가 압도적인 '물리적 힘(Power)'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찢겨나가는지를 증명하는 강대국 정치(Power Politics)의 냉혹한 실체
□ '자발적 무장해제'
결국 도덕적 낭만주의가 서울 한복판에 소환된 결과는, 세계 외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자발적 무장해제와 퇴행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가 쥐고 있던 무거운 방패를 스스로 내려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대국은 비핵화를 향해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는데, 우리는 대화라는 희망에 기대어 동맹의 핵심 억제력을 축소하는 강대국의 계산된 '거래'를 평화의 이름으로 칭송하고 있다. 자체적인 물리적 억제력을 줄이면서 '싸울 필요 없는 평화'를 논하는 것은, 집의 기둥을 허물면서 지붕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애처로운 기도와 같다. 자국의 안보가 강대국의 밀실 거래에 휘둘리는 '종속 변수'로 전락할 위기 앞에서도, 낭만적인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평화는 상대방의 맹목적인 선의가 아니라, "도발할 경우 치러야 할 비용이 이익보다 크다"는 계산을 강제하는 압도적인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위에서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선의에 기댄 낭만주의는 결국 약자의 파멸로 끝난다는 것이 역사의 변함없는 진리다.
강대국들이 철저한 현실주의적 계산표를 들고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동적인 '페이스메이커'라는 허울 좋은 수사가 아니다. 낭만주의의 렌즈를 벗고, 차가운 국가 이성으로 무장하여 독자적 억제력과 구조적 생존 공간을 창출하는 잔혹한 현실 직시만이 이 위태로운 공화국을 구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