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뿐인 인연, 이치고이치에
"우리의 만남은 이치고이치에야."
오래 전, 단지 내 커뮤니티센터 헬스장에 다닐 때였다. 런닝머신에서 처음 걷기 운동을 하고 샤워실로 들어서자, 옆에서 걷던 어르신이 나를 알아보고 물으셨다.
"몇 동에 살아?" "아이는 몇 살이야?"
어르신들께는 오가며 백 번을 만나도 백 번 인사하라 배운 터라 또박또박 답하긴 했지만, 나이와 온라인 게임, 자가 여부까지 탈탈 털리고 나니 멘탈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출한 뒤였다. 그날 이후 헬스장과는 인연을 끊었다. 얼마 뒤, 허리디스크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살기 위해 시작한 수영은, 헬스장과는 달랐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얼른 수경을 고쳐 쓰면 그만이다. 누군가 말을 걸어올 기세면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면 된다. 물속에서는 생존이 우선이다. 신상이 털릴 여유(?) 따위는 없다.
이름과 나이쯤은 국가 기밀로 지키고 싶은 마음에, 더 열심히 헤엄쳤다. 숨이 차도, 체력이 바닥나도 말 걸 틈을 주지 않으려고 자유형 뺑뺑이를 돌았다. 그렇게 열심히 돌다 보니 어느새 실력이 늘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천천히 물을 가르며, 물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유형 발차기 한 번에 둔탁하고도 먹먹한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따라오는 물거품 소리, 뽀글. 손이 입수할 때는 "퐁"하고 작게 터지고, 물을 잡아당길 때는 "쏴아—악"하며 물살이 길게 갈라졌다. 발차기 소리는 멀리서 울리는 뱃고동처럼 둔탁했다. 숨을 쉬려 고개를 들면 "푸웅덩", 잠깐 세상의 소리가 끼어들었다가, 다시 얼굴을 묻으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레인을 왕복할수록 나의 마음에도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요한 리듬이 깨졌다. 수영장을 별장 삼아 홀로 헤엄치고 있었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크고 거친 물소리 —"철퍽, 솨아아악!"— 양팔이 동시에 물을 가르고, 몸 전체가 솟구쳤다 가라앉는 소리. 접영이었다. 물 위로 솟구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하니, 소리도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얼마 전 읽은 양지윤의 <번역가의 일>에서 필사해둔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작가가 일본 어학연수 중 우동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이야기다. 잦은 실수로 혼날 것을 각오했던 작가에게, 점장은 도리어 친절을 베풀며 일본어까지 가르쳐주었다.
"우리의 만남은 이치고이치에야."
일본어가 서툰 작가를 위해 점장은 천천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이치고이치에'는 번역가가 된 이후 내게 더욱 의미 있는 말이 되었다. 샘플 작업본이 뽑혀 번역을 맡게 되면 나는 마음속으로 되뇐다. 내 삶에서 이 바카라을 번역하는 기회는 이번 한번뿐이라고. 그러니 후회가 남지 않도록 단어 하나라도 허투루 넘기지 말자고. 이 바카라과 나는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 이치고이치에니까. _ p.101, 양지윤, <번역가의 일>
일기일회(一期一會).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 '이치고이치에'.
접영을 하다 잠시 쉬고 계신 회원님께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제 안 보이셔서 궁금했어요."
"어제는 오후에 왔어요."
"저랑 비슷한 시간에 오시더라구요. 이렇게 수영장에서 자주 만나는 것도 보통 인연은 아닌데,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생애 단 한번도 아니고, 매일 천 쪼가리만 하나만 걸친 채 물을 헤치는 사이라니. 땅 위에서였다면 절대 내지 못했을 용기를 내어 통성명을 했다.
오늘 함께 물을 가른 인연이, 내일은 땅위의 소중한 인연으로 연결되길 바라며.
최강 I형인 나는, 수영장에서만큼은 예전보다는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E형이 되어갔다. 여전히 먼저 말을 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물속에서는 한 마디를 건넬 용기가 조금 더 쉽게 났다. 물이 나를 다르게 만드는 건지, 물속에서야 비로소 숨어 있던 내가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내일 역시 물속에서 또 다른 이치고이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란 것이다.
내일의 이치고이치에는 또 무엇일까.
[헤엄치듯 읽는 법]
좋아하는 문장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손으로 옮겨 적어보자. 필사는 눈으로 읽을 때 놓치는 문장의 호흡과 리듬을 몸으로 익히는 가장 느린, 그러나 가장 확실한 독서법이다. 에세이 속 한 문장이 내 일상의 한 장면과 겹쳐질 때, 그 바카라은 비로소 나와 인연을 맺은 '이치고이치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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