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켜서 하던 일’이 진짜 ‘내 일’이 된 순간

좋은 상사에게 처음 배운 ‘일을 맡긴다’는 것

byyour philosophy

2019년, 나는 첫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도, 산업도, 직무도 전부 바꿨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소비재에서 플랫폼으로.
재무/전략에서 운영으로.


당시에는 그냥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곳에 더 있다가는 회사가 아니라 일 자체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이상하다.

일을 덜 하고 싶어서 퇴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고 싶어서 회사를 나왔다.



부족보다 기여를 봐준 첫 상사


이직한 회사에서는 내가 나이도 많고 경력도 길었다.

그런데 정작 이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보다 어린 동료들이 훨씬 빠르고 능숙했다.


처음에는 매일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뭘 한 거지?’


그러다 어느 순간 질문을 바꿨다.

‘내가 여기서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는 이 팀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로


모르는 건 물어보고, 잘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대신 내가 가진 경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찾았다.

잘하는 사람보다 쓸모 있는 동료가 되려고 했다.


그 무렵 상사가 1:1 미팅에서 말했다.

“경력답게 잘해줘서 정말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이상하게 그 말이 낯설었다.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했지만
“OO님이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말을 진심으로 들어본 기억은 많지 않았다.


상사는 내가 부족한 것보다,

내가 기여한 것을 먼저 봐줬다.



입사 5개월 만에 다시 그만두고 싶어졌다


입사한 지 다섯 달쯤 됐을 때였다.

회사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여러 공급사 가운데 일부와 계약을 종료해야 했다.


누구와 계약을 끝낼지 기준을 만들고, 직접 통보하고, 이후 발생하는 문제까지 관리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예상대로 반발이 컸다.

공급사들의 항의와 컴플레인은 거의 모두 나에게 들어왔다.


회사가 왜 이런 결정을 해야 하는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매일 사람들에게 계약 종료를 설명하다 보니 마음이 무너졌다.

‘정말 이게 최선인가.’


특히 갑자기 일이 끊길 사람들을 생각하니 도의적 바카라임까지 느껴졌다.

하루 하루가 괴로웠다.


결국 상사에게 말했다.

“저 더 이상 못하겠어요.”

퇴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식당에 마주 앉아 내가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이 맞는 건지 확신이 없어요.”


그가 회사를 대신해 나를 설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말을 했다.

“OO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꿀 바카라임과 권한도 OO님에게 있어요.”



바카라임을 줬다면, 권한도 있어야 한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랐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도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내가 그 일을 다시 설계할 수 있게 해줬다.


계약 종료의 기준과 방식에 내 의견을 내고,
공급사와 어떻게 소통할지 결정하고,
이 일이 남길 파급력까지 고민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처음으로 느꼈다.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것'과 '내 바카라임과 권한의 일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르구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실행만 해야 하면 바카라임은 짐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바꿀 권한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비로소 진짜 '내 일'이 된다.


물론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예상했던 공급사의 반발은 실제로 벌어졌고, 욕도 많이 먹었다.

한동안은 내가 만든 결정 때문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 무력했다.



내가 좌절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회사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사는 예전에 내가 괴로워했던 일을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이전 결정을 보완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일을 다시 내게 맡겼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OO님이 힘들어했던 걸 알고 있어요.
이번에는 OO님이 다시 바꿔보세요.”


그는 내 무력감이 어디서 오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의 담당자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데서 오는 좌절감.

그걸 해결해주는 게 일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거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 경험 이후 일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좋은 리더는 일을 잘 나눠주는 사람만은 아니다.

사람에게 바카라임을 맡겼다면,

그 바카라임을 자기 판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까지 믿고 내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넘어졌을 때
다시 자기 답을 만들 기회까지 주는 사람.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바카라임의 크기만이 아니다.
바카라임은 있는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감각이 사람을 더 빨리 지치게 한다.


그리고 반대로,

내 판단이 실제로 일을 바꿀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일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화, 목, 토 연재
이전 12화우리는 왜 퇴사할 때가 돼서야 솔직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