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모든 것을 얘기하지 마세요. 그거 솔직한 게 아니에요.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그날도 첫차를 탔다. 회사는 남산 꼭대기 소월길에 있었다.
출근길에 일출을 봤다. 발밑으로 해방촌의 작은 집들이 보였다.
다들 아직 자고 있는지 골목이 고요했다.
가을 새벽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공기는 축축하지 않고 촉촉했다.
남산 나무 냄새가 났다. 새벽잠을 포기하고 나온 아침이었는데, 그날은 아깝지 않았다.
출근길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나는 목이 뻣뻣해지고 숨이 거칠어지곤 했다. 퇴근 시간이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중간역에 내려 잠시 쉬었다 가는 일도 잦았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출근할 때부터 잠들 때까지 걱정을 등에 지고 살았다.
그래도 일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력서를 수없이 넣었지만 서류에서 떨어지던 시절, 겨우 들어온 회사였으니까.
아침마다 일출을 보고 출근했고, 밤늦게 퇴근하며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상쾌하게 출근했던 그날 오후,
문득
갑자기
오늘은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유가 없었고 누군가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도 대답하지 못한다.
팀장님께 심하게 혼난 것도 아니었고, 외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문득이었다.
굳이 이유를 하나 꼽자면...
날씨가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우스운 말처럼 들리겠지만 진심이다.
흐리고 차가운 날에 죽는 것보다, 이렇게 맑고 화창한 날에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날에 사라지는 것이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업무를 하다 말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난간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불었고, 서울 남산이 보였고, 나무 냄새가 났고, 골목 어딘가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한낮이었다. 도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그 한낮의 고요가, 나에게는 한밤중 개 짖는 소리보다 소름 끼쳤다.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기로 마음먹은 순간,
내가 가장 소중해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뛰어내리면 숨어 있는 날개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를 훌쩍 떠나버린 사람의 마음처럼.
그때 옥상 한켠에 묶여 있는 백구가 눈에 들어왔다.
덩치가 큰 진돗개였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암에 걸려서 오래 못 살 거라던 건물 주인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백구는 곧 사라질 듯하면서도 매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처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백구가 꼬리를 흔들었다. 살랑살랑
꼬리를 보고 있자니,
죽음을 앞둔 개에게도 누군가를 반겨줄 수 있는 작은 마음의 방 한 칸은 있구나, 싶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뒤로 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아주 가는 밧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가늘고 낡아서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놓는 순간 나는 그냥 사라질 것 같았다.
세상 속으로도, 세상 밖으로도 아닌, 그냥 어디론가.
나는 잘 살고 싶었다. 누구보다.
지금 생각하면, 인생을 '잘', '열심히' 산다는 것이 그토록 오만한 일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정신과를 직접 찾아갔다.
접수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번호표만 있었다. 상담이 시작되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평생 속마음을 타인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으니, 의사 앞에서도 말문이 막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자에 앉자마자 이상하리만치 말이 쉽게 나왔다. 오랫동안 묵혀둔 것들이 순서도 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짓눌러 온 질문을 꺼냈다.
"아픈 것을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어요.
적어도 친한 친구 한 명쯤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픈 것을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선생님은 잠깐도 망설이지 않았다.
"얘기하지 마세요.
지금은 얘기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겠지만, 오히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굳이 모든 것을 얘기하지 마세요. 그거 솔직한 게 아니에요."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처음으로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침묵을 죄처럼 안고 살았다. 아프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 비겁한 일인 줄 알았고, 숨기는 것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덧붙였다. 세상에서 자신을 위로할 단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 그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두 팔로 스스로를 안아보라고.
그 뒤로 나는, 내 상황이나 병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에 죄바카라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편안해졌을 때, 말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감추고 싶은 게 있으면 굳이 꺼내놓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게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의 무게를 지고 산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때로는 한없이 가라앉을 만큼 버거운 것들이 삶 안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모양도, 무게도 다 다르다. 그것을 굳이 꺼내 보일 필요는 없다.
혼자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
잠깐이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임을 알았다.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덜 무겁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가벼우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