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이 멈추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면서, 가끔 안부가 궁금해지고...

by느슨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둘이 등하교를 함께한 친구가 있었다.


'있다'가 아니라 '있었다'


우리는 늘 서로의 집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는 어느새 우리 둘만의 약속 장소가 되었다.

세븐일레븐 편의점 앞,

한편에 서서 기다리면 친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침밥을 꼭 먹고 나와야 하는 아이라 친구는 나를 항상 기다리게 했다.

알면서도 나는 일찍 집을 나섰다.

신기하게도, 그 골목에서 까르르 웃어대던 찰나가 소름 돋듯 나를 안아줄 때가 있다.


서로의 집 냉장고에 뭐가 들었는지 알 만큼 드나들었고,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했으며

중학교 때는 오락에 빠져 학원을 땡땡이치기도 했다.

혹시라도 나보다 더 친한 친구가 생길까 봐 늘 염려하며 편지를 자주 썼다.


친구가 가진 위트와 밝은 에너지를 나는 부러워했고,

친구는 나의 차분함과 성적을 부러워했다.

서로 살짝 질투하면서도 아꼈고, 가족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영원할 줄 알았다.


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아픈 이후 병원을 오가고, 집 안에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기다렸다.

정확히는, 아무 쓸모없는 전화 한 통이 울리기를.

별일 없냐는 문자 한 줄이 오기를.


대학에서 캠퍼스의 자유를 한껏 누리는 친구의 밝은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가 입은 예쁜 트렌치코트를 보았을 때,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디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활짝 웃으며

나에게 걸어올 때.


그때 알았다.

나의 시간이 멈추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속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골목에서 까르르 웃던 그 시간으로부터 겨우 삼 년 뒤

나는 혼자서 친구와 이별했다.



그 뒤로 친구의 생활이 궁금해지지 않았다. 전화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어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일들을 하나씩 마음속에서 지워 나갔다.

소리 없이, 조용히.


죽도록 미워해서 함께했던 과거를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

무작정 잊는 것,

절대 돌아보지 않는 것.

그것이 스무 살 내가 찾아낸 이별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인생 속으로 들어갔다.


각자 가정을 꾸린 이후,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 뒤로 일 년에 한 번쯤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짧은 문장 몇 줄.

그런데 고작 몇 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불쑥 올라온다.


사람을 잊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돌아볼수록 그 시절 내가 친구에게 얼마나 깊이 기대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그냥, 그 시간 동안 곁에 있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미워하고 원망하던 내가 친구와의 시간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이,

조금 기특하기도 하다.



나는 결혼하고도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산다. 가끔 친구의 집 앞을 지나칠 때면 발걸음이 느려진다.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많은 것을 함께 했을까.

우정이라는 단어의 끝을 넘어, 그 이상의 끈끈함까지 느끼는 사이가 되었을까.


이상하게도 그 질문이 예전처럼 아프지 않다.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면서, 가끔 안부가 궁금해지고, 여전히 그 밝은 에너지로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응원하는 것.

그것도 우정의 한 모양일 거다.


혹시라도 내 머릿속에 상자가 있다면, 학창 시절의 시간을 함께했던 그 친구를 넣어두고 싶다. 자주 꺼내 보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자리에.

그리고 언젠가 크리스마스 문자가 오면, 친구를 기다렸던 쓸쓸함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보냈던 그녀와의 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맞잡고 흔들었던 손, 그 온도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했다.

그 시간을 통과해서 지금의 내가 여기 있다.

이전 09화약해서 불안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