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는 손에 들고

인생은 꽤 먼 길이어서, 꽃길이 아니어도 가볼 만해.

by느슨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 소식을 전해올 무렵,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그 나이가 이력서 한 장도 통과시키지 못할 만큼 많은 나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면접 한 번 보지 못한다는 것이 사람을 그토록 작아지게 만드는 일인 줄은 몰랐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무모한 용기는, 타인들의 평가 앞에서 사그라들었다.


어느 나이나 힘들지 않은 나이는 없다. 그래도 이십 대가 유독 힘들었던 것은, 내 인생인데도 내가 주인공이 아닐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들이었지만 세상의 잣대 앞에서 쉽게 놓아버렸다.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고, 프랜차이즈 주방에서 튀김을 건졌다.

현실이 참 박하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동안, 꿈도 내려놓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월급이 제날짜에 나오는 곳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고 어쩌다 면접 기회만 주어져도 감사했다.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몇 번을 떨어졌는지 세는 일도 어느 날부터 그만뒀다.

세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의 바닥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는 일 같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 프로젝트에서 이어진 인연이 실 한 가닥처럼 이어져 광고 회사의 면접 기회가 생겼다. 나는 제일 먼저 블라우스와 정장과 구두를 샀다. 왠지 예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감이 있다.

물론 대부분은 틀렸지만.


면접 날, 폭우가 쏟아졌다.

그날 폭우를 뚫고 달렸던 나의 초인적인 능력을 잊지 못한다.


강남구청 뒷골목 어딘가에 있다는 회사를 찾아 삼십 분을 헤맸다. 같은 골목으로 몇 번이나 돌았고, 면접 시간은 자꾸만 다가왔다. 그때 나는 구두를 벗었다. 한 손에 구두를 들고, 맨발로 빗물이 고인 골목을 달렸다.


스물여덟, 매번 취업에 낙방한 사람이 비 오는 날 맨발로 골목을 뛰는 장면.

지금 생각하면 꽤 볼 만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절박했었다.

맨발로 골목길을 뛰었던 달음박질은 특별한 것을 향한 게 아니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 보통의 하루를 향한 것이었다.


살색 스타킹은 찢어진 채였고, 퉁퉁 불어버린 발로 면접장에 앉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퇴근 시간이 지난 이후라 사무실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훗날 나의 사수가 된 팀장님은 흠뻑 젖은 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빨리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기억에 남은 건, 거짓말 하나.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에 남자친구도 없다고 했다.

그 시절엔 그런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던 때였다.

부당한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따질 자리가 아니었다. 취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나의 예감은 처음으로 적중했다. 합격 소식은 다음 날 오전에 들렸다. 기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혼이 났다. 말이 너무 많았다. 정보가 너무 많았다. 내가 배우는 중인지, 숨만 쉬고 있는 중인지, 잘 몰랐다.

그래도 한 번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창한 의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생각 없이 써댔던 카드값을 내려면 월급이 필요했다. 월급을 받으려면 일을 해야 했다. 그뿐이었다.

인간을 버티게 하는 건 때로 아주 단순한 이유다.


나는 참 느렸다.

하루 종일 아팠다. 긴장도 많이 했다. 실수도 잦았다. 겁도 많았다.

안 좋은 것은 유독 골고루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인내심만큼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잠을 자다 보면 간호사 선생님들은 피를 뽑아갔다. 혈관이 약한 나는 세 번, 네 번을 찔려도 피가 뽑히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이 바뀌고 나서야, 피가 나왔다.

그때 내가 배운 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피가 나오는 것처럼, 끝은 있다는 것.


그렇게 누구보다 치열했던 스무 살을 보낸 나는 모든 장애들을 인내심으로 지나왔다.

묵묵히 보낸 그 시간들은 경험이 되었고 돈보다 더 큰 것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의 팀장님을 지금도 가끔 만난다. 얼마 전 자리에서, 그분이 말씀하셨다.

신입 때는 너무 날이 서 있어서 안타까웠는데, 지금은 아주 편안해 보인다고.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날이 서 있었다는 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편안해 보인다는 건, 아마도 그 간절함이 어디엔가 조용히 가라앉았다는 뜻일 것이다.


빗속에서 구두를 벗어 들고 달리던 사람이,

우산을 들고 여유를 갖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여유는 성공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서 온다는 것을.



가끔 사람들은 대학을 왜 그렇게 오래 다녔냐고 물어본다.

나는 얼버무린다.

의대에서 보낸 시간도, 백지 답안지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던 그 구름도

실패가 아니라 묵묵히 통과한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편안해질 수 있었다.

실패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꿈을 이루겠다는 마음 대신, 첫 온라인 게임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어깨가 가벼워지는 날이면 주변 사람도 눈에 들어오고, 지나치던 풍경도 보인다.

그런 날이면 나는 가끔 잔디밭에 누워 구름을 보던 스물네 살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냥 누워 있었던 그 아이,

터미널 대합실에서 한없이 울던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인생은 꽤 먼 길이어서, 꽃길이 아니어도 가볼 만해.

돌아보면 꽃길보다 비 맞은 골목길 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라"


낯선 사람의 짧은 한마디가 너를 붙들었던 것처럼,

살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또 올 거다.

분명, 예고 없이.


너무 단단하게 긴장하며 웅크리고 있지 말자.

온기가 스며들 틈은 남겨두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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