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봐도 우리 딸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낯선 생명이라기보다 아주 익숙한 나의 어린 시절이 번갈아 스쳐 지나간다. 어릴 적 나는 소독차만 지나가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엄마 뒤로 숨어 오열을 하곤 했다. 내 딸 역시 소리에 유독 민감하다. 집 안에서 자그마한 소음만 들려도 "무서워! 무서워! 엄마 안고“ 하고 외치며 두 팔을 넓게 벌린 채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온다. 나를 꼭 안아오는 그 작고 떨리는 몸을 마주할 때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무서워 늘 주춤거리던 어릴 적 내 모습이 고스란히 겹쳐 보인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뭐가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워“ 하고 아이의 실체 없는 무서움을 얼른 지워주려 애썼다. 그러다 육아서를 읽으며 문득 내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불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요즘은 아이가 뛰어오면 더 세게 꼭 안아주며 나지막이 말해준다. "무서웠구나. 무서울 수 있지. 근데 엄마랑 같이 있으면 조금씩 괜찮아질 거야." 마음을 먼저 읽어주고, 아이가 스스로 한 발짝을 내딛을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는 연습을 한다.
그렇게 아이 마음을 다독이다 보면, 생각 하나가 마음에 인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뭐가 무서워"라고 말하는 대신 "괜찮아, 무서울 수 있어"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내 안의 겁 많고 불안했던 날들을 누군가 먼저 다정하게 읽어주었더라면, 내가 조금은 더 편안한 결을 가진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같은 것이다.
새로운 공간에 갈 때면 이번엔 남편의 어린 시절이 재현된다. 남편은 어린 시절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였단다. 내 딸 역시 낯선 환경에 놓이면 적응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발을 동동대며 땅에 딛지 않고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는 것은 부지기수. 어린이집에 다닌 지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등원거부를 하며 오열하는 아이를 볼 때면 일렁이는 죄바카라감이 마음을 괴롭힌다.
밤에 잠들기 전 내 얼굴과 코를 작고 말랑한 손으로 조물 거리며 온기를 확인하는 모습도 똑같다. 엄마 얼굴을 만지며 잠들었다던 남편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남편은 어릴 때 꿈이 사육사였단다. 동물이라면, 특히 강아지라면 사족을 못 쓰던 아이였다. 온 동네 개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어머님이 곤란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결혼하고서야 들었다. 내 딸은 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는데 똑같다. 길에서 강아지만 보이면 쫓아간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하나하나 다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강아지가 무서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남편이 아마 저랬겠구나 싶다. 어머님이 말씀하시던 그 어린 시절의 남편이, 지금 내 눈앞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잠들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인정욕구가 꽤 있어 보이는 것, 쪽쪽이나 기저귀 같은 물건에 애착을 보이는 것.. 평소 닮지 않기를 바랐던, 내가 나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몇 가지 지점들을 선명하게 닮은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어릴 적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던 지나간 날들에 아릿해지다가도, 정작 아이의 불안한 눈빛을 마주할 때면 '나도 저랬겠지' 하며 어린 날의 나를 비로소 조용히 품어주게 된다. 아이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이에게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주며 어릴 적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던 셈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단지 나이를 먹거나 세월을 통과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를 닮아 겁 많고 조심스러운 이 작은 존재의 마음을 가만히 읽어주는 동안, 나 역시 타인과 나 자신을 향해 조금 더 다정한 품을 가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 믿고 싶다.
아무튼, 이래저래 제대로 거울 치료 중이다.
(27개월 육아는 정말 미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