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손익계산서
단순히 계산기만 두드려봐도 답은 명확하다. 3년의 공백, 내 커리어의 멈춤과 함께 벌 수 있었지만 벌지 못한 돈을 단순 계산하면 도합 3억 언저리 정도 되겠다. 온라인 게임인으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벌 수 있었던 3억을 벌지 못했다는 건 자본주의 슬롯에서 꽤나 치명적 손실로 느껴진다. 세상은 점점 눈에 보이는 숫자로 가치를 증명하라고 다그치고, 그에 물들어버린 나 역시 이 거대한 손실 앞에서 완전히 초연해지기란 쉽지 않다.
이 3년이라는 숫자의 내막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10개월의 난임휴직, 잠깐의 복직을 거치고 들어간 3개월의 출산휴가, 그리고 두 돌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육아휴직까지. 매 순간 온 힘을 다 해 통과해 온 시간의 총합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복리처럼 3년이라는 거대한 숫자로 불어났다. 아마 그것은 단순한 시간이라기보다 엄마가 되고자 했던 간절함, 출산의 불안, 육아의 경탄까지 겹겹이 쌓인 내 생의 흔적이기도 했다.
회사는 내게 많은 것을 주던 곳이었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던 숫자의 안정이 좋았고, 내 이름 석자가 박힌 명함이 주는 은근한 소속감도 달콤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증명해 낼 때마다 정직하게(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차오르던 효능감은 나라는 존재의 선명한 좌표이기도 했다. 완성된 보고서, 너저분한 바카라상, 가끔 동기들과 깔깔대며 회사 욕을 하는 메신저 대화조차 안락하고 정돈되었던 궤도. '엄마'라는 이름보다 '차장'이라는 직함이 내 존재를 훨씬 그럴싸하게 증명해 준다고 느끼던 날들도 분명 있었다. 그곳에서의 나는, 적어도 슬롯가 인정하는 내 쓸모를 매일 확인받고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궤도에서 잠시 스스로 걸어 나와 있다. (내가 먹어도 정말 맛이 없는, 먹지 않는 아이가 이해되는) 밥을 부지런히 만들고, 뒤돌아서면 어질러져 있는 장난감을 끝없이 치우고 있자면, 이 거대한 손익계산서가 머릿속을 거칠게 스치고 지나간다. 분명 온종일 손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막상 밤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묘한 허탈감이 밀려온다. '3억', 그 숫자가 떠오를 때마다 수시로 본전 치기의 계산법을 들이민다. 이 돈이면 다음 집으로 갈아타기를 할 때 보탤 대출이 눈에 띄게 줄었을 테고, 부모님께 용돈도 팍팍드리고, 해외여행을 몇 번은 더 다녀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이면, '그래도 시터 이모님을 쓰는 대신 내가 직접 아이를 키우며 아끼는 매달 3백만 원만큼의 가치는 하고 있다'며 소심한 숫자로 나를 위로하곤 한다.
이 기나긴 터널 끝에 회사로 복귀했을 때 완벽하게 '감다뒤'가 된 내 모습이 덜컥 무서워지기도 한다. 트렌드는 저만치 달아나 있고, 내 직감과 감각들도 모두 뒤처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비겁한 두려움. 내 노동의 결과물이 고작 몇 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 가사노동 속에서, 내가 온 힘을 다해 쌓아 올렸던 그 팽팽한 업무텐션들은 다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아득해지는 날들. 슬롯적 자아가 희미해지는 걸 스스로 느끼고 목격하는 일이 생각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육아는 결코! 단연코!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제 막 두 돌이 된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인 동시에, 내 밑천을 완벽하게 드러나게 하는 가장 까다롭고 두려운 존재다. 이유 없는 부림에 가까운 거친 떼쓰기 앞에서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고, 매일 밤 기절하듯 잠들면서도 '내일은 또 이 폭풍을 어떻게 버텨내지' 싶어 체력과 인내심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밑천까지 탈탈탈X2 털어 내 새끼에게 부어주다 보면, 가끔 몸과 마음이 아득해진다. (상무님, 팀장님의 까다로운 요구를 받아내는 편이 훨씬 덜 지쳤었던 것 같다는 망상이 들 만큼, 잔인하고 매서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 고단 끝에 까무룩 잠든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밤이면, 3억이라는 숫자가 기묘하게 힘을 잃는다.
내 딸 인생 첫 두 해. 이 시간을 통과하며 아이가 내게 보여준 세계는 3억이라는 숫자로 감히 환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처음으로 내 눈을 맞추며 방긋 웃던 순간, 서툰 발걸음으로 내 품에 안겨 오며 세상의 전부를 얻은 듯한 표정을 짓던 순간들. 똑같은 바카라을 수십 번씩 읽어주고, 내 눈에는 한눈에 보이는 쉬운 퍼즐을 아이가 고민하며 맞추는 걸 가만히 기다려주는 시간들. 철저하게 아이의 속도와 시선으로 살아가는 기묘한 비효율. 그것은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세상의 문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오직 생명과 생명이 온전히 부딪힐 때만 발생하는 신비 같은 것이었다. 그 밀도 높은 비효율의 시간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월급, 복귀 후의 두려움 대신, 내 삶이 이토록 조건 없이 뜨겁게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내 영혼의 지경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 끄아(좋아), 엄마 가치(같이)가, 엄마 물 이시요(주세요)‘
자신이 아는 단어를 조합해 조잘조잘 제 마음을 표현하는 두 돌 아이. 그 거실 한가운데 서 있으면 신기하게도 그 아깝던 3억의 본전도, 다음 집의 평수를 넓히지 못하는 아쉬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회사가 주던 효능감과 숫자의 안락함은 결국 유통기한이 있는 소모품 같았지만, 아이와 함께 쌓아 올린 이 시간은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밑거름으로 영원히 남을 테니까. 자본의 논리로는 손실일지 몰라도, 내 삶의 논리로는 이보다 더 완벽한 풍요는 없다.
그래서 아직은 이 손익계산서를 완성하지 않으려 한다. 육아는 계속되고, 우리 부부와 아이의 계산도 역시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여전히 삶의 가장 가치 있는 무형자산을, 남편과 함께 잘 쌓아가고 있다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