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신호들
"엄마, 나 오늘 영어시험 3 플러스래."
와츠앱에 문자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율이 막 수업을 마친 시간이었다.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지난번 영어 시험에서는 4점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엄마와 공부를 하고 가서 영어 시험 점수가 조금 올라 기뻐하는 율에게 축하한다는 답을 남겼다. 독일에 간 지 두 달이 되어 이제 독일어로 보는 영어 시험도 처음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 스스로 기뻐하는 율이 대견했다.
"엄마, 근데 내일부터 방학이라서 아쉬워. 금요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과목을 많이 하는데 금요일부터 학교를 안 간대."
나는 다시 물었다. '방학이 시작되어 아쉽다고?' 율은 금요일은 1교시를 안 하고 2교시부터 시작해서 6교시까지 하는 날이라 유일하게 늦게 일어나도 되는 날이라고 했다. 모처럼 느긋하게 일어나서 스포츠를 2 시간 하거나 가끔은 종일 수영장에서만 수업을 하기도 해서 금요일에 학교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달콤한 금요일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목요일에 가을 방학식을 하고 금요일부터 쉰다고 하니 조금 아쉬운 모양이다. 나는 무척 반가웠다. 독일 학교에 잘 적응했다는 신호이기에 이 또한 부모로서는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
물론 방학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학교에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열 살 율이 여전히 의아하지만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독일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상상이 되면서 조금은 뭉클하기도 했다.
독일은 주(州)마다 방학이 다르다. 교육이 각 주의 권한이라 방학 날짜가 16개 주마다 제각각이다. 올해 가장 먼저 가을 방학을 시작한 곳이 헤센이고, 10월 5일(월)부터 10월 17일(토)까지 약 2주간 진행된다. 반면 바이에른이나 바덴뷔르템베르크는 11월 2일에야 시작해 6일에 끝나는 짧은 방학을 보낸다고 하니 주마다 학사일정이 많이 다른 모습이 신기하다. 이렇게 가을 방학의 날짜를 나누는 이유는 고속도로나 휴양지가 한꺼번에 붐비지 않게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가을 방학은 동시에 쉬는 주가 일곱 곳을 넘지 않아 여름보다 교통이 덜 몰린다고 한다.
독일의 가을 방학은 과거 농번기에 아이들이 일손을 보태어 감자 수확을 돕던 이른바 '감자 방학(Kartoffelferie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과거 19세기와 20세기 초 독일 농촌 슬롯에서는 가을이 되면 온 가족이 매달려 일 년 내내 주식으로 먹을 감자를 수확해야 했다. 당시 농부들은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까지 밭으로 불러내곤 했고, 이로 인해 가을철 수확기만 되면 학교에 결석하는 학생이 속출해서 국가와 학교에서는 무단결석을 막고 농가의 일손을 합법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아예 이 시기에 맞춰 2~3주가량의 공식적인 휴식기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 감자 방학의 시작이라고 한다. 현대에는 아동 노동이 엄격히 금지되고 농업도 기계화되면서 아이들이 직접 밭에 나가 감자를 캐는 일은 사라졌지만 그 방학의 시기와 전통만큼은 그대로 남은 것이다. 지금에야 수확의 의미보다는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한두 달 뒤에 찾아오는 첫 휴식기로서의 역할이 크지만 우리의 명절연휴가 있는 가을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양인 듯하다. 독일 가정들은 방학에 주로 가까운 유럽 등지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 2주라는 긴 시간 덕분에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따뜻한 남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가까운 숲으로 하이킹을 가기도 한다.
율은 홈스테이 식구들과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야간 침대 기차로 베네치아로 가서 로마를 거쳐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디언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율은 한국에서 세계사에 관심이 많아서 주로 썬킴의 세계사를 듣고 썬킴이 쓴 역사바카라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하지만 독일에 가서는 적응하느라 썬킴의 세계사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와 베네치아 역사에 관한 내용이 있는 영상을 골라 율에게 공유했다.
"율, 엄마랑 수학공부한 지 너무 오래됐다. 수학 문제집 언제 풀까?"
"엄마, 독일 수학 숙제할 게 많아서 엄마랑 한국 수학 풀 시간이 없어."
추석 연휴가 겹치며 각자 바쁜 날을 보내다가 오랜만에 랜선 수학 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더니 율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동안에는 수학공부와 영어단어시험을 엄마랑 준비하며 더 오래 영상통화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는데 이제는 율이 통화를 하며 엄마의 사랑을 충전하지 않아도 충분히 독일 생활을 잘 이어가는 것 같다. 게다가 이제는 엄마가 시켜서 억지로 공부하는 수동적인 유학생이 아니라 실로 스스로 해야 할 공부의 분량과 우선순위를 정할 줄 아는 독립적인 아이로 변해가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매일 가디언 선생님과 통화하는데 요즘에는 가디언 선생님이 율이 형님과 즐겁게 잘 생활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칭찬의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율이 집중력이 좋아져서 방과 후에 집에 와서 해야 할 공부를 빨리 끝내서 이젠 축구클럽에 주 2회에 가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5시부터 시작하는 축구 훈련을 위해서는 더욱이 율이 독일어, 영어, 수학 공부를 4시에 다 끝내 놓는다며 웃으셨다.
율의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강력한 동력 중에 축구다. 방과 후 공부를 집중력 있게 스스로 빨리 끝내버리는 진짜 이유가 축구라는 것에 그동안 한국에서 온 가족이 율을 따라 축구장에 쫓아다닌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다. 그라운드를 뛰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통제하고 해야 할 공부를 맹렬히 끝마치는 율의 모습은 지난 두 달간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완벽한 생존법이 아닐까? 이토록 건강한 생존법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여전히 주위 많은 지인들이 열 살 아들을 혼자 독일로 유학 보낸 것에 대해 걱정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엄마인 나보다 더 마음이 쓰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와 율은 독일로 유학 가는 것에 대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독일 생활이 힘들거나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도 많이 하고서 실행한 일이라 오히려 걱정스러운 마음이 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덜한 지도 모른다. 또 믿을 수 있는 홈스테이 가정의 가디언 내외분과 형님들이 있으니 마음이 더 놓이기도 한다.
가을 방학을 맞이하여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을 위해 가디언 선생님은 치팅데이를 마련하신 모양이다. 방학식을 하느라 평소보다 일찍 학교를 마쳐서 곧장 근처 가게에서 즐겁게 치킨을 폭풍흡입하는 사진을 보니 오늘도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