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19
레온에서 다시 한국인 동행 셋과 멕시코에서 온 M까지 넷이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르고스에서부터는 거의 혼자 걷다시피 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걷는다는 게 내심 좋았다. 어제는 레온에서부터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까지 걸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새로 생긴 알베르게에 묵으며 오랜만에 세탁기로 묵은 때를 빼고, 시원하게 씻고 나오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도 기쁨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순례길의 매력이다.
씻고 잠시 쉬다가 간식거리를 사러 마을에 하나 있는 슈퍼마켓으로 갔다. 마켓에 들어가니 낯이 익은 사람이 보였다. 바로 이전에 같은 방을 썼던 노부부였다. 부르고스 이후부터 여러 번 같은 방을 썼었고, 심지어 4인실을 같이 썼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분들이었다. 다만 방에 있을 때는 항상 조용히 바카라을 읽고, 먼저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도 딱히 말을 걸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밖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이라 용기를 내어 한번 올라(Hola), 인사를 해보았다. 그러자 물건을 고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가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름이 무엇이냐고 스페인어로 물어보았다. 내가 외운 몇 안 되는 스페인어 문장 중 하나였다. 노부부는 항상 스페인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었던 터라 잘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고 말을 건넸는데, 그분들의 답변은 내 예상 범위를 벗어났다. 뭐라고 스페인어로 길게 답변을 하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어지간하면 하나라도 들려야 하는데, 한 달간 파헤친 듀오링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걸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저런 나라 이름을 대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브라질에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알아듣는 말이 하나도 없었던 거였다. 그분들은 스페인어가 아니라 포르투갈어를 하고 있었다. 그분들은 포르투갈어를 하기 때문에 서툰 나의 스페인어도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거였다. 내가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건 것이 반가웠는지 할아버지는 꽤나 길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길어질 때쯤 그 뒤에서 낯익은 동양인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 며칠 전 자전거를 타며 내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갔던 아저씨였다. 그런데 옷차림을 보니 언뜻 보아도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원래 낯선 이에게는 말도 안거는 내가 순례길에서는 왠지 오지랖이 발동해 무얼 찾는지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충전기를 찾고 있으시단다. 어제부터 충전기 선이 끊어져서 휴대폰을 충전을 못하신다고 했다. 내게 여분이 있으니 빌려드리겠다고 하니 한사코 거절하시며 내일 더 큰 마을에 가니 거기서 구매를 하겠단다. 남에게 빚지기를 싫어하시는 이 아저씨는 잠시 스쳐가며 헤어질 사이가 될 줄 알았는데, 이 날 이후로 우리 동행과 종종 코스가 겹치며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갔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떠난 레온에서부터의 순례길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메세타 평원을 지나온 탓에 이전보다는 마을들이 조금 더 크고, 세련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중간 지점부터 출발하는 순례객들이 점차 많아지며 가게들도 활성화가 되고, 이런저런 기반 시설이 갖춰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을 해보았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를 지나 아스토르가로 가는 날은 오랜만에 정말 순례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메세타 평원과는 달리 중간중간 마을도 자주 나오고, 언덕과 내리막, 초원과 고속도로와 같이 다양한 지형지물을 지나는 만큼 오랜만에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이렇게 다이내믹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반드시 하루를 짧게 느끼게 해주지는 않았다. 이날 따라 정말 걷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서 아스토르가까지는 불과 15km 남짓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라면 3시간 안에도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순례길에서 15km만 걷는 날은 흔치 않을 만큼 짧은 거리였다. 그런데도 유독 길게 느껴졌던 것은 아스토르가 마을에 진입하는 구간이 빙 돌아서 올라가는 데다가 마을 초입부터 알베르게까지가 그 어떤 마을보다 멀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한국인 S와 마주쳤다. 한국인 S는 알베르게에서 가장 먼저 출발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에 S를 마주쳤다는 건 그만큼 내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뜻이었다. 나는 내심 기쁜 마음으로 S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S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내가 부르고스에서 신발을 바꾼 이후로 확실히 걸음이 빨라졌다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다만 S는 메세타 평원 중반부터 감기에 걸려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 둘의 속도가 맞춰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쳐 보이는 S에게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들려줄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어제 새롭게 듣기 시작한 노래 한 곡을 소개했다. 바로 며칠 전 발매된 악뮤의 신곡 '소문의 낙원'이었다.
S에게 혹시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최근에 악뮤노래를 듣지 않아서 신곡이 나온 지도 몰랐단다. 나도 악뮤의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어쩐지 어제는 어떤 신곡이 나왔을까 궁금해 오랜만에 악뮤 노래를 들어보았다. '잠깐 앉아요, 따뜻한 수프와 고기가 있어요.'라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가볍게 들으려고 했던 귀가 탁 트였다. 이건 분명 순례길에 관한 노래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에서 지나가다 이 노래를 들었다면 그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평범한 응원가 중 하나라 여기며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는 이 노래가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가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을 해보니 악뮤의 수현이 산티아고 순레길을 걸으며 겪은 경험을 찬혁에게 해주었고, 그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낸 것이 소문의 낙원이란다. 역시 순례객끼리는 마음이 통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나에게 큰 위로가 된 가사, 그리고 순례길을 다 걷고 나서야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가사가 있다. 바로 '느리게 오래 걸어가요'라는 가사였다. 내가 바쁜 서울 하늘 아래 걸어갈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걸어야 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커리어를 쌓아나가야 하고, 이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남들보다 멋진 성공을 일궈내야 했다. 속도는 그 성공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였다. 그런데 느리게 오래 걸어가라니?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 가사를 곱씹다 보니 내가 넘어지던 날 호주 아저씨 D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겹쳐 들렸다.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순례길을 걷고 있는데 마침 순례길에 대한 노래를 악뮤가 냈다고 하니 S도 관심이 생겼는지 바로 들어보겠다고 했다. S가 이어폰을 꽂는 것을 보니 다시 혼자 걷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눈치껏 속도를 올려 S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철도 위 육교를 건너고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고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 알베르게는 모든 방이 2인실로 운영되는 곳이었는데 방에 들어가니 처음 보는 순례객이 누워있었다. 아마 피곤함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낮잠에 든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자기소개를 할 수 있었는데 이 친구는 산티아고 도착까지 자주 함께할 독일인 J였다. 레온에서부터 출발한 탓에 친해질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온화한 성품 탓에 순례길 중에 마주치면 늘 힘이 되어주는 동행이었다.
씻고 방에서 쉬니 한국인 M과 K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S는 오늘이 K의 생일이라며 다 같이 생일 축하해 주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생일 기념으로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거하게 밥을 먹어보자고 제안했다. 숙소에서 2분 떨어진 거리에 미슐랭 식당이 있다기에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그곳으로 향했다. 미슐랭 식당답게 웨이터는 품위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고, 어떤 메뉴들이 좋은지 추천을 해주었다. 웨이터가 영어를 하지 못해 자세하게 메뉴 설명을 듣기는 어려웠지만, 우리에게는 스페인어 능통자 M이 있었다. M은 능숙한 스페인어로 각 메뉴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이 식당의 메인 메뉴 중 하나인 대구 요리를 시켰다. 18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만 먹다가 5만 원이 넘는 대구요리를 먹으니 맛있으면서도 배가 차지 않는 게 확실히 미슐랭 식당이 맞나 보다. 뭔가 헛헛한 배를 뒤로 한 채 M과 K의 방에 가서 늦은 밤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