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에서 쉬어가는 하루

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18

by설읽은

레온에 밤늦게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는 그 다음 날 걸음을 멈추고 레온에서 하루 종일 쉬었다. 작은 아시안마켓에 가서 라면도 몇 개 사고, 데카트론에 들러 마을에 도착해 돌아다닐 때 가볍게 맬 가방도 샀다. 그리고는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가 레온 대성당에도 다녀왔다. 찾아보니 레온 대성당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기에 일부러 해가 잘 드는 오후 늦은 시간에 방문했다. 표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바로 앞에 낯익은 캐나다 아저씨 M의 뒷모습이 보였다. 넓은 레온에서 이렇게 다시 마주치다니 반가운 마음에 바로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반갑게 나의 인사를 받으며 어제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제 하루동안 50km를 걸은 이야기를 하며 건강하다는 듯 손목을 움켜쥐어 보였다. 아저씨는 역시 젊은 사람은 다르다며 대단하다고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내게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이제 오늘이 나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저씨는 레온에서부터는 프랑스길을 따라가지 않고, 북쪽길을 따라가 해안도로를 걷는단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던 날, 아저씨는 북쪽 지방은 더 추울 거라며 외투를 사 왔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제 삼분의 이를 넘긴 시점이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한 명을 다시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줄을 기다리며 아저씨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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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레온 대성당은 내가 여태껏 가본 성당 중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지는 햇빛을 받아서인지 더 영롱하게 유리 한 조각 한족각이 각자의 색을 아름답게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조각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감상하느냐 여념이 없었다. 레온 대성당은 스테인드 글라스 외에도 볼거리가 참 많았는데, 성당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박물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조각상이나, 설치된 예술품들이 많았다. 순례길에서 들렀던 다른 성당들과는 달리 레온 대성당은 아마 미사보다는 관광상품으로써 더 개발되고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성당을 나와 이리저리 레온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참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보이는 뭉게구름을 매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울에서는 빌딩숲에 둘러싸여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었는데, 순례길에서는 하늘을 위로 올려다보지 않아도 저 앞 멀리 지평선 위 하늘이 펼쳐진다. 그리고는 그 위에 뭉게뭉게 구름이 뭉쳐진 것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뭉게구름을 거의 본 기억이 없는데, 유독 순례길에서는 솜사탕을 뭉쳐놓은 것처럼 몽실몽실 구름이 피어나는 게 자주 보였다. 그 푹신한 구름을 보며 나는 모난 나의 마음을 둥글게 둥글게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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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나니 한국인 동행 K에게서 연락이 왔다. 타파스를 먹으러 돌아다니고 있으니 같이 먹자는 연락이었다. 그곳에 가니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한국인 M이었다. M은 현재 멕시코에서 일하는 나와 동갑인 친구였다. M은 멕시코에 살면서 스페인어를 배웠다면서 유창한 스페인어로 멋들어지게 저녁 메뉴를 주문했다. 미국인 S와 V 외에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동행은 처음이었는데, 누군가 현지어를 할 줄 아는 것이 이렇게 든든한 일이라는 것을 이날 처음 느꼈다.


M은 죽기 전에 꼭 이뤄야 할 버킷리스트 3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2개는 이미 이루었고, 마지막 남은 하나가 바로 순례길이었단다. 마침 휴가를 길게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부르고스에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바로 티켓을 끊었다고 했다. M은 부르고스에서 K와 처음 만났고, 그 뒤로 쭉 같이 걸어왔단다. K가 나보다 하루 늦게 걷게 되면서 만난 인연인 것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항상 순간이 차이로 엇갈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순간의 차이 때문에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고 신묘막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야외 테라스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왠지 모르게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남들 바쁘게 걸을 때 버스 타고 마을을 건너뛰며 하루를 벌었던 부르고스와는 달리 내 두 발로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건너뛰며 하루를 벌었다. 무임승차한 기분에 늘 찝찝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는 내 두 발로 땀 흘려가며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무언가 비었던 나의 하루가 땀으로 빼곡하게 채워져가고 있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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