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원짜리 하루

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10

by설읽은

어제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든 것 치고는 그렇게 일찍 눈이 떠지지는 않았다. 대략 일곱 시쯤 일어났다. 새벽같이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알베르게에서 나가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늦은 시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짐을 싸고 출발한 상태였다. 대강 알람을 맞춰놓기는 하지만 아침잠이 잘 없는 나로서는 최후의 보루로 늦은 시간으로 알람을 맞춰놓기 때문에 설마 이 시간에 일어나겠나 싶었는데, 몸이 정말 피곤했는지 그전에 깨지 않았나 보다.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가니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 몇 명이 보였다. 앉아서 간단하게 먹을 것들을 입에 넣고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일단 발목이 너무 아파 한걸음 떼는 것조차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 통증이 시작된 것이었다. 침대에 일어나는 것도, 사다리를 타고 2층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최소한 금이 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아픈 통증이었다. (이 통증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도 한 달은 넘게 지속됐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병원을 갔었을 거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앉아있었는데 동행 중 언제나 여유만만인 미국인 친구 V가 보였다. 캘리포니아 출신답게 시간에 쫓기는 법 없이 모든 것을 즐기는 데다 모든 일을 긍정적인 마인드로 맞이하는 친구다. V는 순례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가장 밝은 에너지를 뿜는 친구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모든 숙박객이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 여덟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이제 막 일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조급함은 없이 마치 알베르게 주인 마냥 느긋하다. 내가 전날 마시려고 두었다가 결국 마시지 못한 우유를 건넸더니 마침 자기한테 시리얼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운이 좋다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어느덧 시계는 8시를 가리켰다.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날 줄 알았지만, 숙소는 조용했고 V와 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다음 알베르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새벽같이 출발하고, 아득바득 순례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나만큼이나 걸음 속도가 느린 V는 항상 마지막에 출발하고는 걷는 중간중간 카페며, 레스토랑이며 들를 수 있는 곳은 다 들르다가 마지막에 도착한다. (사실 어제 내가 마지막 체크인인 줄 알았지만 여자 방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 하나가 더 있었고, V가 저녁 늦게 도착해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순례길을 걷고 있는 V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매일 걷니? 숙소에 자리가 없을 수도 있잖아."


"그냥 걷는 거지. 즐기려고 온 거잖아?"


질문한 사람을 무색하게 만드는 깔끔한 답이었다. 그렇게 걷는 데에는 애초에 이유가 없었다.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자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걱정에 내 순례길을 망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덧 여덟 시 반이 되었다. V는 슬슬 출발해야겠다며 먹던 그릇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오늘 이곳에서 연박을 할 것이 아니라면 버스를 타는 것은 어떻겠냐고 말을 했다. 멍하니 앉아있느라 오늘 하루 어떻게 할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어제 호주인 친구 B가 버스를 타고 이 마을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순례길의 일부니 내 두 발로, 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걸어가야 한다고 우겼었는데,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상태가 되니 무척이나 고민이 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산토 도밍고까지 가는 열한 시 반 버스가 있었다. 어젯밤 한국인 동행들은 21km 정도 떨어진 산토 도밍고로 하겠다고 했었다. 산토 도밍고는 나름 마을 규모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이드북에서는 산토 도밍고를 경유하는 것을 추천했다. 마침 알베르게를 떠나는 V에게 인사하며 이따 산토 도밍고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니 자신은 그라뇽으로 갈 거라며 내일이나 모레 다시 만날 수 있겠다는 말을 하며 나갔다. 지금까지 같이 걸었던 외국인 동행들은 모두 산토 도밍고보다 2시간을 더 걸어가야 나오는 그라뇽으로 간다나.


그렇게 인사를 하고 아홉 시를 넘겨서까지 1층에서 쉬다가 버스 시간이 확실한지 확인해 보러 짐을 싸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어차피 체크아웃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눈치가 보이던 차였다. 밖으로 나오니 3월의 순례길은 아직도 겨울이어서 영하에 가까운 추운 바람이 몰아쳤다. (오후에는 우박까지 쏟아지는 매서운 날씨였다.) 바람에 맞서며 2~3분이면 닿을 거리를 10분 정도 느릿느릿 걸어 터미널에 도착했다. 시골 마을의 버스 터미널이라고 해봤자 아주 작은 유리 부스에 버스 한 대 잠깐 설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아직 열지 않은 유리 부스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확인하니 11시 반쯤 출발하는 산토도밍고행 버스가 역시 있었다. 이제 2시간을 어디서 보내야 하나 두리번거리다 보니 나처럼 짐을 가득 가지고 있는 순례객 두 명이 보였다. 내 행색은 누가 봐도 순례객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는 적당한 타인인 마냥 옆으로 조심히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산토 도밍고로 가는 카풀을 구하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카풀을 꾸렸는데, 한자리가 비어 바로 출발할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마침 나도 산토 도밍고로 가던 차였기에 내심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도 말을 걸어주길 바랐다. 그런 나의 기대와는 맞지 않게 그 말을 꺼낸 여자는 불결한 물건이라도 본 마냥 나를 경계하며 흘기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 터미널 앞 벤치에 계속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호주 퍼스에서 왔다는 중년 V였다. V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우연한 만남은 나의 남은 4주 동안의 순례길을,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삶의 방향을 확 바꾸었다.


"혹시 산토 도밍고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 나는 그라뇽으로 가. 저 친구들은 산토 도밍고로 간다는데 한번 저기 가서 물어보는 건 어때?"


아까 카풀을 구한다던 그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순례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이에게, 심지어 나를 환대하지도 않는 이에게 다가가 굳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라뇽이라는 단어가 내 귀에 박혔다. 오늘 아침 처음 V한테 들었던 마을 이름이었다. 왜 모두들 산토 도밍고로 가는데 그라뇽으로 가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 마을에서는 성당 다락방을 알베르게로 사용해서 색다른 경험을 해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다른 알베르게와는 다르다고 했다. 자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버스를 타고, 남편은 아침 일찍 그라뇽으로 먼저 떠났다면서 모바일로 예약한 버스표를 나에게 보여줬다. 자세히 보니 10분 뒤에 도착하는 버스였다. 2시간 동안 어떤 가게도 열지 않고, 추운 이 동네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고민이 들던 차였기에 그라뇽으로 가야겠다고 급하게 계획을 수정했다. 자신은 혹시나 해서 버스표를 예매했지만,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거라 현장에서 바로 버스표를 살 수 있을 거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십분 정도 지나자 시간에 맞추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타 요금을 계산하고 자리에 앉으니 누군가 반갑게 한국어로 나를 불렀다. 한국인 동행은 모두 나를 앞질러 갔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인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가족과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내 또래 T였다. 가족들과 함께 걷다 보니 속도가 늦어져 로그로뇨에서 며칠을 더 쉬었단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힘들어하셔서 중간 길을 더 걷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다음 대도시까지 건너뛰는 거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온몸이 아프고 추위에 시달리다가 며칠 만에 다시 반가운 얼굴을 보니 이게 순례길이 주는 소소한 행복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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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5분을 채 달리지 않았는데 벌써 그라뇽에 도착했다며 버스 아저씨가 차를 세웠다. 하루 반나절을 힘들게 걷는 길이 버스를 타고서는 15분, 그리고 2천 원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어제 호주 친구 B가 내가 힘들게 노력한 것이 겨우 2천 원짜리 노력인가 허탈함이 느껴졌다고 한 얘기가 기억이 났다. 정말 나의 노력이 2천 원짜리인 걸까 하는 찝찝함을 남긴 채 짐을 챙겨 발걸음을 옮겼다.


그라뇽은 언덕 저 위에 있고, 버스는 고속도로 한복판에 우리를 내려주었는데 성당이 위치한 마을 중심까지 걸어가는 데만 30분은 걸렸던 것 같다. 알베르게가 열기까지는 2시간이 넘게 남았기에 V와 카페에 잠시 가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하루 힘들게 걷는 일이 오늘은 고작 2천 원짜리였다며 자조적인 멘트를 날리니 V는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다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긴장을 풀고 나니 2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는 V와 각자 살아온 삶에 대해서 나누고, 어떻게 하다가 순례길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 커튼으로 가려진 어둠 속에서 어질러져있던 의문의 블록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다. 힘들게 내 돈과 시간을 들여 나는 왜 이곳을 걷고 있는지, 내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왜 나는 걷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오늘 나의 하루 수고는 정말 2천 원짜리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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