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9
어제는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가는 길에 차 사고를 당할 뻔했다.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출발했는데도 오후 4시가 넘도록 숙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남은 거리를 보니 5시는 되어야 알베르게에 도착할 것 같았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 굳이 먼 길을 돌아 남들보다 한 시간을 넘게 더 걸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늦게 도착해서 언제 빨래를 하며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슈퍼마켓에는 언제 들러서 저녁 먹을거리를 사고 쉴 수 있을까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워지기만 했다. 숙소에 거의 빈자리가 없이 차고 있다는 동행의 연락까지 받으니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고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을 홀로 걸으니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따라주지 않는 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때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차가 지나가는 2차선 도로를 건너가야 했다. 차가 오는지 확인해 보니 아주 멀리서 차가 한대 오고 있었다. 못해도 300m는 더 되는 거리였고, 내가 건너기까지는 한참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와 부딪힐세라 걸음을 재촉해 건너고 있는데, 아주 큰 경적소리가 귀를 울렸다. 얼마 시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차가 속도를 올려 거의 부딪히다시피 차가 나의 뒤로 스쳐 지나간 것이다. 분명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차선 하나를 몇 초에 안에 건너지 못할 만큼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속도가 지금 얼마나 느린지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은 채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내 걸음이 느린 것이 단순히 나를 해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피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니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차도를 다 건너고 나니 그제야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한 발짝도 움직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마을 입구에서부터 숙소까지도 15분은 더 걸어야 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대로 숙소에 자리가 차버리면 그때는 정말 조금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죽을힘을 다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앞으로 순례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앞질러갔다. 저 사람이 마지막 한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속도를 올렸지만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세 5분도 되지 않아 그 청년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숙소를 향해 정신없이 걸어가고 잇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 숙소에서 자주 마주쳤던 대만 아주머니 M이 길건너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대화를 많이 해보진 못했지만, 어느 순간 매일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고, S에게서 몇 마디를 해본 적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은 탓에 내적 친밀감이 막 생겼던 차였다. 원래 나헤라에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공립 알베르게가 공사로 문을 닫았다고 다리 건너 바로 보이는 알베르게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이미 지나쳐온 슈퍼마켓에 가는 중인 듯했다. 실제로는 제대로 말을 해본 적도 없는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다니 참 감사했다. 그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더 먼 공립 알베르게까지 갔다가 헛걸음을 할 뻔했다. 어쩐지 K와 S가 숙소에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게 그 탓이었나 보다.
숙소에 들어서니 S와 K는 물론이고, 며칠째 같이 걸었던 외국인 친구들이 모두 1층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눌 기운조차 남지 않아 그대로 가방을 내려놓고 주인아주머니가 체크인을 해줄 때까지 구석에 주저앉아있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부르더니 혹시 예약을 했느냐고 물었다. 예약을 따로 하지 않았다고 하니 한 여자에게 스페인어로 이런저런 내용을 물었다. 알베르게에 한 자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자만 있는 그 여자의 방에 나를 들여도 괜찮을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괜찮다고 했고, 그러자 바로 주인아주머니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비를 뚫고 장장 열두 시간 가까이 걸어오느라 긴장한 몸이 그제야 힘을 풀었다.
간단히 몸을 씻고 빨리 쉬고 싶었는데, 팔을 다친 데다 가슴에 타박상이 너무 심해 팔을 조금이라도 드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탓에 대충 물을 칠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밖에 나와 상처를 감싸던 밴드를 하나씩 뜯고 보니 하나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계속해서 피가 흥건했다. 누군가 봤으면 무슨 살인사건이라도 난 줄 알았을 거다. 그렇게 새로 밴드를 붙이고 방에 들어가 쉬려는데 정말 노인이 되면 이렇게 걷게 되는 거구나 싶을 정도로 원래 나의 걸음 반의 반도 안 되는 보폭으로 천천히 1층 라운지로 내려갔다. 그렇게 20개도 되지 않는 계단을 뒷걸음질로 내려오는데 못해도 3분은 걸린 것 같았다.
라운지로 내려와 저녁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으니 호주인 친구 B가 보였다. 뭔가 쌩쌩한 듯한 모습에 농담으로 오늘 제대로 안 걸었으냐고 말을 걸었더니 정곡을 찔린 듯 갑자기 B가 놀란 듯하다가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사실 오늘 로그로뇨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왔다고 실토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왔을 거란 생각은 못하고 그냥 몸이 가벼워 보이길래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정말이었다니 나도 흠칫 놀랐다. 자신은 로그로뇨에서 더 쉬고 싶었는데, 프랑스인 친구 J가 앞으로도 계속 같이 걸었으면 좋겠다고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단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 정오쯤 나헤라로 오는 버스를 탔다고 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버스를 탄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면서 나한테 하소연을 했다. 나는 그런 B를 놀리면서도 순례길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하루만으로 너의 한 달 여정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위로했다. 물론 그 말이 맞다고 여기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차마 그런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내 질문이 불러올 내일의 일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B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