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에서 눈썰매를? 게다가 무료?
단 세 단어가 우리의 여행지를 결정했다. 곰솥 가득 끓여놓은 카레도 세 끼까지는 거뜬히 먹는 먹성 좋은 남편이지만, 여행지만큼은 갔던 곳을 또 가기 꺼리는 여행 편식쟁이다. 그런 남편에게 스위스 융프라우요흐에서 탔던 눈썰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던 모양이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또 다른 썰매는 그에게 파인 다이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인스브루크 정상에서 남은 썰매를 찾고 있는데, 첫째가 갑자기 "소은아!" 하고 한껏 높은 톤으로 외치더니 인파 쪽으로 뛰어갔다. 학교 친구를 집에서 약 550km 떨어진 곳에서 마주친 것이다. 두 아이가 손을 맞잡고 방방 뛰며 "너 여기 왔어? 언제 왔어?" 조잘거리는 모습이 딱 초등학생다웠다. 나도 어느새 친구 어머니께 평소보다 더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방수 장갑이 알프스의 눈에 젖어 축 늘어질 때까지 썰매를 타고 나서야, 우리는 악삼스의 숙소로 향했다. 알프스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지나자, 집이 점점 드문드문해지고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여기가 마을 끄트머리인가 싶을 즈음 사진으로만 보던 집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썰매 타느라 잔뜩 웅크렸던 근육을 펴려고 양팔을 하늘 위로 길게 뻗는 순간이었다. 묘한 냄새가 찬 공기와 함께 코끝을 간질이더니, 들이마시는 숨에 콧구멍 안으로 훅 들어왔다.
소 냄새였다.
명절마다 소를 키우는 큰아버지 댁에 가면 맡던 그 냄새. 아주 오래된 기억이라 잊고 있었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으로 돌아간 듯했다. 긴 혀로 콧구멍 주위를 핥아 코가 반질반질하던 그 소도 떠올랐다.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숙소 바로 옆에 실내 배드민턴장만 한 거대한 축사가 있었다. 아니, 바로 옆이라기보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숙소와 붙어 있었다.
그 냄새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앞마당에서 꼬꼬댁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인기척을 느꼈는지 닭 특유의 꿕꿕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게다가 닭 한 마리는 탈출을 감행했는지, 머리를 앞뒤로 까딱이며 울타리 바깥을 유유히 맴돌고 있었다.
아이들은 소 냄새가 난다며 손가락으로 코를 움켜쥘 땐 언제고, 닭장을 보자마자 병아리를 찾겠다며 곧장 뛰어 내려갔다. 닭장 근처 땅이 질퍽해서 신발 밑창이 진흙 범벅이 될 게 뻔했지만, 신이 나서 달려가는 아이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나중에 벗어놓은 신발 밑창을 보니 진흙뿐 아니라 동글동글한 토끼 똥까지 끼어 있었다. 닭의 이웃 주민으로 토끼도 살고 있었나 보다.
소와 닭의 콜라보에 한동안 숙소에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알프스 자락의 서늘한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소 안에도 또 다른 동물이 들어앉아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했는데 다행히 밝은 나무 가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런데 창틀도 죄다 나무였다. 이중창, 삼중창은 유럽에서 합창단을 소개할 때나 쓰는 말인가? 오늘 밤은 좀 춥겠는걸. 아이들에게 내복을 꼭 껴입고 자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관문을 닫자, 집 안은 거짓말처럼 따뜻해졌다. 문 하나를 닫았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의 냄새와 소란이 마당 저편의 일이 되어버렸다.
도란도란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보드게임을 한 판 하며 밤을 맞이하고 나서야 마을 외딴곳에 자리한 이 집의 진짜 특장점을 알게 되었다. 알프스의 검은 하늘 위로 누군가 행성 가로등을 켜고 다니는 듯 별이 하나둘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카라에서 별과 별 사이를 손가락으로 이으며 배웠던 별자리가 이토록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니. 핸드폰 카메라 기본 모드로 찍어도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이 담길 정도여서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모른다.
먼지 하나 없이 맑고 새카만 밤하늘에는 오리온이 있었고 카시오페이아가 있었다. 나무 창틀은 그대로 하나의 액자가 되었다. 우리는 한참을 창가에 서서 아는 별자리를 찾아보았다. 하나를 찾고, 또 하나를 찾고. 그렇게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숙소를 정리하고 떠날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또다시 닭장으로 달려갔다. 울타리 밖을 돌아다니던 닭은 잠도 밖에서 잤는지, 아이들 발소리에 푸드덕 깨어 저쪽으로 가버렸다. 닭들이 아침에 알을 낳는다던데 정말 알이 있는지 확인도 하고, 어느새 닭들에게 붙여준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불과 어제만 해도 소 냄새가 난다며 코를 움켜쥐던 아이들이, 이제는 떠나기가 아쉬운 듯 닭장 앞을 한참 서성였다. 나도 어젯밤 알프스의 별들이 아쉬워서 나무창 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꼬미, 꼬꼬, 꼬순이, 꼬잉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