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by김태민

빨래를 걷으려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낡은 지붕과 맞닿아있다. 꼭 가을 같은 날씨다. 환한 가을볕이 모시이불에 투명하고 맑은 색을 입혔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옷가지를 산들바람이 흔들고 지나갔다. 부푼 셔츠 소매가 왈츠를 추는 것처럼 한들거렸다. 창고에서 캠핑용 의자를 꺼냈다. 옆 건물의 그림자가 만든 기다란 그늘에 앉았다.


시험비행을 하는 고추잠자리들은 금세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집 앞 골목 은행나무 이파리 색이 전보다 옅어진 것 같았다. 계절감은 달라졌는데 아파트 공사현장 너머 상록숲만 여전히 푸르다.


떠나는 계절을 꼭 붙잡고 있는 손길이 억세다. 오늘 아침 산바카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밤을 주웠다. 명학공원 입구에 서있는 밤나무 아래 밤송이들이 선물처럼 널려있었다.


초록빛이 도는 덜 익은 밤송이 몇 개를 가져다 화분에 담아놓았다. 볕이 잘 드는 곳에 두면 수분이 날아가면서 천천히 입을 연다. 알밤이 몇 개나 들었는지 확인하게 될 때, 아마 그때쯤 가을이 올 것 같다.


걸음이 느린 가을은 지각을 한다. 때맞춰 오는 법이 없다. 늦더위가 물러가고 큰 비가 두 어번 내리고 나면 그제야 고개를 내민다. 늘 그렇듯이 올해도 늦을 것 같다.


선선한 남실바람과 같이 내미는 멋쩍은 인사를 모른 척하고 늘 받아준다.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쪽이 매번 지는 짝사랑을 닮았다. 폭염도 폭우도 없는 평온한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을 기다린다.


요즘은 틈만 나면 산바카라을 한다. 마중 나갔다가 혼자 돌아오지만 괜찮다. 가볍게 읽을 만한 얇은 바카라 한 권을 들고 공원이나 강변을 걷는다. 쉴 만한 자리를 발견하면 앉아서 30분쯤 독서를 한다.


챕터가 끝나면 바카라갈피를 끼워두고 바카라장을 덮는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마음껏 흘려보내는 사치를 부린다. 날씨가 좋으면 다 좋다.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들마저 아름답게 보인다.


어제는 호안교를 지나 서로교까지 걸었다. 강 건너편 레미콘 공장을 물들이는 초저녁 하늘이 예뻐서 한참 동안 구경했다. 때 묻은 세월이 햇살에 씻겨나갔다. 안양천에 보금자리를 튼 오리들이 느린 속도로 헤엄치면서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갔다.


수면에 비친 하늘이 일렁이더니 동심원 모양의 파문이 퍼져나갔다. 강변에 서있는 버드나무 그림자는 형태를 잃고 물결 속으로 이지러졌다. 그 사이 내면 깊숙한 곳의 불안과 긴장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빈자리에 평온함이 깃들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주머니 속 지갑은 전보다 여위었지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마음은 조금 여유롭다. 어린 시절 아빠 구두를 닦고 용돈으로 받은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꼭 쥐었을 때의 느낌.


이맘때의 여유는 오래된 기억 속 기분 좋은 무게감을 닮아서 편안하다. 걱정을 달고 사는 고단한 삶에 허락된 쉬는 시간은 짧다. 봄가을은 찰나와 같고 여름과 겨울은 세월처럼 길다. 그래서 더 각별하다.


짧아서 아쉽지만 그만큼 추억이 많은 계절이다. 작년 가을을 떠올렸더니 얼굴 위로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9월이 끝날 때까지 늦더위가 이어지더니 10월은 하루 건너 비가 내렸다.


그러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가을이 찾아왔다. 긴 터널을 나오자마자 쏟아져내리는 빛줄기를 맞는 것처럼 황홀했다. 눈길이 닿는 모든 것들이 찬란하다 못해 찬연했다. 유난히 예뻤다.


꿈을 꾸는 것처럼 좋은 계절이었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은 떠나도 행복했던 순간들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오늘 같이 날이 좋을 때면 한 번씩 꺼내본다. 시선은 파란 하늘에 두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장면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괜히 더 생각날까 봐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늘 밖으로 나왔다. 내리는 햇살을 가득 맞았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 반짝였다 사라지는 불빛이 꼭 추억 같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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