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여름을 떠나보냈다.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었다. 큰 비가 내린 이튿날부터 기온이 큰 폭으로 내려갔다. 아침 일찍 거실 창문을 열었더니 방충망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공원을 가득 채웠던 매미 소리는 사라지고 청아한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살랑이는 바람이 잔잔한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싣고 왔다. 선선해서 러닝 하기 딱 좋은 날씨다.
머릿속으로 코스를 그리면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신발장에서 꺼낸 러닝슈즈를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 순간 건너편 빌라 유리창에 비친 새파란 하늘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가운데 떠 있는 새하얀 뭉게구름은 소풍날 놀이공원에서 사 먹었던 소프트아이스크림 같았다. 선물가게에서 파는 예쁜 엽서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비슷한 하늘을 만났던 순간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봤다.
아련하면서도 그립고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계단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 위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얗게 녹은 햇살이 눈을 간지럽혔다. 눈가에 희미한 여름의 손길이 닿았다.
마음을 바꿨다. 활기찬 러닝 대신에 여유로운 산바카라을 선택했다. 화창한 날씨를 핑계 삼아 변덕을 부리기로 했다. 동네 마실용 크록스로 갈아 신고 명학 공원을 걸었다. 사람들을 따라 둘레길을 돌았다.
천천히 걸었더니 뒤에 있던 남실바람이 저만치 앞서나갔다. 나무들이 춤을 추는 동안 해는 가느다란 빛줄기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여섯 바퀴쯤 돌고 나서 벤치에 앉았다.
키가 가장 큰 떡갈나무 가지에 실구름이 걸려있었다. 입으로 불면 멀리 날아갈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닮은 뭉게구름은 공원을 산바카라하는 사이 다 녹아버렸다. 맑고 파란 하늘을 눈 속에 담았다.
새까만 눈동자 표면에 감도는 푸른빛은 어쩌면 감청색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느긋하게 여유로움을 채웠다. 간 밤에 안고 있었던 복잡한 감정들은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을의 첫날이다.
조금 늦었지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야 할 때다. 집으로 돌아와서 운동복을 세탁했다. 옷걸이에 걸린 여름옷을 살펴봤다. 낮기온이 아직 높은 만큼 옷정리는 조금 미뤄도 괜찮을 것 같다.
침구도 마찬가지다. 차렵이불을 꺼내려면 멀었다. 그래서 가을맞이로 간단하게 집정리를 할 생각이다. 집수리를 할 만큼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치우고 청소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다.
우리 집은 지은 지 40년 넘은 빨간 벽돌집이다. 사람으로 치면 손이 많이 가는 환자다. 계절과 계절 사이 간절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도 잔병치레를 한다. 일교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손을 쓰는 편이 낫다.
오늘은 우선 화단만 정리하기로 했다. 옥상에 빨래를 널고 창고에서 모종삽이랑 빗자루를 꺼냈다. 쓰레기봉투까지 챙겨서 뒷마당으로 내려갔다. 화단정리에 앞서 배수구를 점검했다.
잡다하게 얽혀있는 이물질을 골라내서 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화단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장마철이 오기 전에 풀을 골라냈는데 몇 주 사이에 다시 뿌리를 내렸다.
이번에는 모종삽으로 흙을 파서 뿌리까지 골라냈다. 담장을 타고 올라온 담쟁이덩굴도 떼어냈다. 뽑은 풀더미는 담벼락 아래 한 단으로 쌓았다. 화단 구석에 이름 모를 풀꽃 몇 송이가 숨어있었다.
새끼손톱 절반 만한 크기였다. 여름이 몰래 숨겨놓은 흔적 같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여기저기 금이 간 바닥을 뒤덮고 있는 이끼 역시 손대지 않았다. 초가을 이슬을 먹고 자라는 이끼는 잡초의 번식을 막는다.
군데군데 깨진 콘크리트까지 덮어준다면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는 초록색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작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숲을 내려다보는 거인이 된 것 같다.
빗물받이까지 점검하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정리를 마무리하고 들어가려다 화단과 담장 사이에서 색이 바랜 은행잎을 발견했다. 가을이 몰래 두고 간 편지였다.
귀퉁이가 찢어지거나 잎맥이 해진 곳은 없었다. 좁은 돌 틈 사이에서 눈과 비를 피했나 보다. 물 빠진 노란빛이 예뻐서 챙겼다. 집으로 올라왔다. 바카라장에 꽂아둔 두꺼운 영한사전을 꺼냈다.
한가운데를 펼치고 은행잎을 넣었다. 주름이 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덮었다. 낙엽으로 바카라갈피를 만들었던 작년 가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나고 보면 결국 좋은 것들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