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아래서

by김태민

가을은 노을이 예쁜 계절이다. 10월의 저녁노을은 매일 봐도 좋은 사람을 닮았다. 가만히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다. 가을비가 내린 다음날 본 금빛노을이 참 고왔는데 오늘 만난 노을은 더 예쁘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카메라를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사진 대신 기억으로 남겨야겠다.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좋은 것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본능이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둔 기억을 꺼내본다.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색감이나 빛깔은 그대로다.


어린 시절 애향공원에서 본 노을을 떠올렸다. 엄마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고 저녁노을을 구경했다. 붉게 물든 하늘이 가까워질 때마다 멀리 손을 뻗었다. 어른이 되면 구름을 만질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이였다.


뺨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바람이 좋아서 내내 웃었다. 눈가를 간질이는 가느다란 햇살을 피하려고 눈을 감았다. 볕이 닿은 눈꺼풀 안쪽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매일 잔업을 마치고 밤늦게 오는 엄마가 일찍 퇴근했던 날. 그래서 더 각별했던 모양이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기억 속에 몰래 숨겨뒀다. 잊지 않으려고 노을을 만날 때면 종종 꺼내서 들여다봤다.


낡은 공장잠바를 입은 엄마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바라보는 하얀 얼굴 위로 고운 초승달 같은 미소가 아른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억에 행복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던 순간이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장면들이 뒤이어 따라 나왔다. 해가 지면 예향공원 건너편의 빨간 벽돌집들은 어두운 색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울타리나 빗장은 없었다.


골목길 풍경이 눈에 선하다. 저녁만 되면 열린 창문 너머로 밥 짓는 냄새가 담을 넘나들었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 끝을 맴도는 것 같다. 월급날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집집마다 불판에 고기 굽는 소리가 거실을 채웠던 동네.


안양7동이 덕천마을로 불렸던 시절의 기억이다. 밥 먹고 가라는 온기 가득한 말이 인사로 통했던 시대였다. 오랜만에 안양천서로를 걸었다. 가을이 보내는 화사한 편지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흩날렸다.


도보를 뒤덮고 있는 노란 은행잎이 여름의 발자취를 지워버렸다. 안양천을 따라 이어지는 동로와 서로는 예전 모습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 신축 아파트 뒤로 공업도시였던 안양의 옛 모습이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져있다.


세월을 맞고 변색된 공장담벼락은 예전에 비해 많이 낮아진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옛 흔적을 발견할 때면 감정이 멋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30년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아직 남아있는 것도 있고 영영 잃어버린 것도 있다. 무심결에 둘을 비교하려다 그만뒀다. 그리움을 돌려보내고 애써 마음을 달랬다. 걷다 보니 덕천교까지 왔다. 타오르는 불길이 환하게 빛나던 하늘의 가장자리는 보랏빛으로 변했다.


노을이 타고 남은 재가 모이면 밤이 된다. 흐릿한 잔불을 배경 삼아 서있는 고층아파트 단지 앞으로 안양천이 흐른다. 은백색 수면에 비친 모습이 꼭 물구나무를 선 거인 같았다.


대칭을 이루고 있는 데칼코마니를 사이에 두고 가느다란 햇살이 손을 흔들었다. 수직으로 잘라낸 하늘 사이로 구름이 남기고 간 궤적이 보였다. 퇴근시간의 비산대교를 지나다 보면 종종 마주칠 수 있는 광경이다.


내 키보다 긴 그림자를 동행 삼아 집까지 걸었던 해질 무렵 하굣길이 떠올랐다. 의미 없이 지나갔던 평범한 순간들마저 추억이 됐다.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한참 동안 기억 속을 헤집었다.


아름다운 순간들만 들여다볼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을 저녁은 짧다. 벌써 어두워졌다. 노을이 남기고 간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들다 10분쯤 지나자 완전히 시들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불씨를 밤이 삼켜버렸다. 까만 뱃속에서 불빛 대신 별빛이 반짝였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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