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계절 사이

by김태민

낮이 짧아졌다. 입추를 지나고나서부터 해가 부쩍 게을러졌다. 샛별이 얼굴을 내미는 저녁이 되면 더위는 힘을 잃고 늘어진다. 여름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서다.


명학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수리산 능선을 따라 내려온 어두운 산그늘이 축축하게 땅을 적셨다. 물기가 묻어나는 선선한 바람이 풀꽃을 쓸고 지나갔다.


풀잎을 스치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높이 뛰어올랐다. 산바카라하러 나온 사람들이 둘레길을 돌면서 꼬리 잡기를 했다. 분수 앞 벤치에 앉아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구경했다.


공원 건너편 아파트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햇살이 도롯가에 고여있었다. 이른 어둠이 노을의 가장자리를 갉아먹는 모습이 꼭 뽕잎을 먹는 누에 같았다. 여름이 남기고 간 흔적을 덧칠하면서 다가오는 가을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새하얀 여름볕이 누그러지고 노란 금빛이 감돌 때쯤 수줍은 존재감을 내비친다. 낮동안 숲 속 깊은 곳에서 밤이 입을 옷을 짠다. 밤의 긴 옷자락이 세상을 벨벳 커튼처럼 부드럽게 뒤덮었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코 끝에 물기를 머금은 나무와 이끼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산마루 위로 반짝이는 금성이 보였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이들을 마중 나온 모양이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이맘때 초저녁 하늘은 평온하고 고요하다. 산바카라하기 좋은 날들이 며칠 째 이어지고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걸쳐있는 짧은 간절기.


두 계절 가운데 자리 잡은 좁은 점이지대에 발을 들였다. 2주만 지나면 오늘 같은 날씨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이맘때면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산바카라을 한다.


어제는 오랜만에 삼성천변을 걸었다. 만안로와 석천로 사이의 삼성천은 시간이 강물처럼 더디게 흐르는 곳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산바카라로를 따라 걷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 같은 세월이 쌓여있는 오래된 주택가는 한적했다. 느린 걸음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한자로 쓴 명패가 대문 앞에 붙어있는 단층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있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드러나는 삶의 흔적 속에서 익숙한 그리움을 만났다. 대나무 돗자리 위에 햇살을 맞고 빨갛게 익은 고추가 잔뜩 널려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어딜 가나 볼 수 있었던 흔한 풍경.


아파트 단지가 늘어나면서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다. 추석을 앞두고 말린 고추를 빻느라 분주했던 동네 방앗간 모습마저 추억이 됐다. 첫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동네 사람들은 집집마다 고추를 말렸다.


옥상이나 앞마당에 방수포를 깔고 고추를 말리는 집이 하나 둘 늘어나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소리 없이 담을 넘는 밤을 닮은 계절. 여름은 거칠게 달려드는 파도 같았고 가을은 천천히 경계선을 지우는 물결 같았다


여름 내내 떼 지어 몰려다녔던 소나기구름이 세력을 잃고 먼 곳으로 물러났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 빈자리를 채웠다. 제방 위로 올라와서 삼성천을 눈으로 훑었다.


맑은 강물 속에 쪽빛 하늘이 가득 담겨있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간절기는 매번 짧다. 그래서 이맘때 만나는 풍경들이 참 각별하다. 스치고 지나는 평범한 시간 속에서 특별한 순간을 발견하고 기록한다.


낮에 평화공원을 걷다가 쭉 뻗은 메타세쿼이아를 구경할 겸 잠시 벤치에 앉았다. 햇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투명한 조각들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반짝였다. 상냥한 산들바람이 잠시 머물다 떠났다.


우듬지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여름이 보내는 작별인사 같아서 이파리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속으로 배웅했다.


예쁜 장면을 오래 간직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으로 남겼다. 아쉬움과 함께 떠나는 계절을 담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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