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가운데 붉은빛이 도는 보름달이 걸려있다. 오랜만에 보는 블러드문이다. 작년 가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고 반년만에 재회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초점을 맞추고 조도를 조절한 다음 셔터를 눌렀다.
달빛을 사진에 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어제 내린 비가 봄비였나보다. 사진 속에 봄의 흔적이 남았다. 보름달 아래 뻗어 나온 나뭇가지 위로 작은 꽃눈이 맺혔다. 밤공기는 차갑지만 3월은 봄이다.
두 주만 지나면 꽃눈을 단 가지 위로 푸른 새순이 올라온다. 성결대학로를 따라 늘어서있는 은행나무들은 이파리 대신 소금처럼 작고 하얀 별을 안고 있다. 붉게 물든 달빛 사이로 사자자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평소에 쉽게 볼 수 없었던 레굴루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손끝으로 별과 별사이를 잇다 처녀자리까지 닿았다. 청백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스피카를 보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남쪽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스피카는 목동자리의 아크투루스 다음으로 찬란한 별이다. 태양보다 2만 배나 밝은 1 등성이다. 지구로부터 250광년이나 떨어져 있지만 스피카의 푸르스름한 광원은 선명함을 잃지 않는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밝다.
새까만 밤을 곱게 수놓은 별을 보고 점자바카라을 떠올렸다.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 오돌토돌한 촉감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빛은 침묵의 언어다. 소리 없이 마음에 닿는다. 둥근달을 품은 밤하늘은 고요하다.
세상의 모든 잡음이 전부 다 사라졌다고 착각할 만큼 조용했다. 여왕이 잠자리에 들 때 두르는 검은색 벨벳가운이 온 세상을 감싼 것 같았다. 하늘은 맑고 달빛은 부드럽다.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밤이다.
노을빛을 닮은 고운 색감이 예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달과 별을 눈에 담는 사이 소란스러운 내면의 소음은 잦아들었다. 춥지만 밖에 나오기를 잘했다. 느린 걸음으로 문예로를 지났다. 걸으면서 골목길 위에 잡다한 생각을 내다 버렸다.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고 종종 밤산바카라을 한다. 밖으로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지만 돌아올 때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진다. 걷기 좋은 밤이다. 눈길이 오래된 기억에 닿았다. 처음 명학으로 이사 왔을 무렵 집 옥상에 작은 평상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누워서 별을 구경했다. 거리에 가로등도 몇 개 없던 2000년대. 주변에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던 시절. 수리산 아래 명학동은 별이 정말 잘 보이는 동네였다.
방수페인트가 벗겨진 옥상 시멘트 바닥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이는 달빛에 손을 적셨던 순간이 떠올랐다. 달밤에 별 보기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취미였다. 팔을 괴고 누워서 상록 숲을 너머로 고개를 내민 별을 세거나 산마루에 걸려있는 별자리를 관찰했다.
밤이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가상의 점 하나를 찍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도서관에서 빌려온 천문학 바카라을 펼치고 숨어있는 별을 찾는 즐거움은 각별했다.
꼬리를 달고 질주하는 유성을 보면 꼭 소원을 빌었다. 가격표가 붙어있는 욕망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쁜 소망을 기원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기억은 남았다. 몸을 숨기는 하얀 여우처럼 별똥별은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희미한 잔상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때가 그리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북극성에 잇닿은 천구의 북극 너머 작은 별무리가 보였다. 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별빛이 명학성당 위로 내려앉았다.
별들이 나를 마중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친구처럼 아련하고 반가웠다. 별과 달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구경하고 싶어졌다. 수리산 중턱에 서있는 만안도서관까지 걸었다.
안양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자주 찾는 나만의 야경명소다.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가면 빨간 벽돌로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이 펼쳐져있다. 작은 성냥갑들이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 것 같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있는 안양 6동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은 별빛을 흔들어놓고 밤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불을 끄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사람들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