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by김태민

눈부신 햇살이 병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을볕에 물든 엄마의 머리카락 끝에 반짝이는 빛망울이 맺혔다. 테두리가 빛나는 구름을 닮은 모습이 예뻐서 엄마랑 나는 같이 웃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아버지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포장지에 싸인 커다란 배가 들어있었다.


가을배가 제일 맛있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멋쩍게 웃었다. 내일모레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늘 챙겨주고 싶은 존재인가 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잊고 지냈던 기억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무른 곳 하나 없는 동그란 배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켜켜이 쌓여있는 세월을 헤집었다.


바카라을 붙잡고 사는 삶을 뒤로하고 아버지는 농부가 됐다.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 산을 개간하고 밭을 일구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갈색으로 그은 얼굴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다. 계절이 시작될 때 집을 떠난 아버지는 계절이 끝날 때쯤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이 새로운 일터였다. 매년 아버지는 일 년 농사를 마무리 짓고 추석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마다 매번 빼놓지 않고 잘 익은 배를 몇 상자씩 챙겨 왔다. 여기저기 녹이 슨 93년식 그레이스 트렁크를 열면 신문지로 싼 배가 가득했다.


수확철을 맞이한 과수원 한 복판에 서있는 것 같았다. 배농사가 잘됐다면서 아버지는 봄날의 배밭이 예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배꽃이 피는 4월이 오면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냈다. 푸른 산속의 작은 배밭은 새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예뻤다.


사진 속 봄햇살 아래 흩날리는 꽃잎은 마치 눈송이 같았다. 아버지는 제일 크고 예쁜 배를 종이가방에 따로 담아서 엄마에게 건넸다. 가족에게 주는 추석선물이었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파는 배보다는 작았지만 벌레 먹은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여름 내내 땀 흘려가며 고군분투한 아버지가 얻은 결실이었다. 배는 설탕시럽 듬뿍 끼얹은 것처럼 달았다. 다른 농사가 잘 안 되더라도 배농사만큼은 예외였다. 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밭에 제일 먼저 배나무부터 심었다. 다른 농사일보다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였다.


가을이 오면 약속한 듯이 상자 가득 배를 담아서 돌아왔다. 크기는 들쭉날쭉했지만 달고 시원한 맛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아버지의 농사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일은 사람이 하지만 결과물은 하늘이 낸다. 구슬땀을 흘려가며 키운 작물이 폭우에 쓸려내려 가도 별 수 없다.


애써 기른 블루베리는 태풍이 쓸어버렸고 공들였던 호박농사는 이른 서리를 맞고 접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빠짐없이 배를 가져왔다. 전보다 작고 조금 모났지만 역시나 맛은 달콤했다. 말없이 잘 익은 배를 건네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까지 전하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번번이 놓쳐버렸다. 입술을 떼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고된 농사일로 굽은 어깨를 보면서 그저 배가 달다는 말만 계속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까맣게 그은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미소가 꼭 소년 같았다.


올해도 아버지는 하지 못한 말과 전하지 못한 마음을 종이가방 속에 가득 담았다. 불쑥 내민 손에 들려있는 탐스러운 배는 가족들을 향한 약속이자 진심이었다. 삶에 깃든 진심을 읽는 법을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배를 깎아서 입에 넣었다. 눈물이 날 만큼 달고 맛있었다.


그리운 시절을 품은 기억들이 천천히 눈앞으로 지나가면서 반짝였다.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 가장자리로 정말 좋아했던 장면들이 흘러내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날들을 너무 쉽게 흘려보낸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찬란한 순간들이 품고 있는 질감은 그대로다.


정신없이 사느라 잊고 지냈지만 그래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날들은 기억의 풍화작용에서 저만치 벗어나있다. 결코 변색되거나 퇴색되는 법이 없다. 가득 쌓인 두꺼운 세월을 걷어내면 변함없이 아름답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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