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슬롯의 패러다임 — 카프 이후에

bywinterfyellb

카프와 임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나는 세태소설론이나 내성화, 이식문학론 등 그들의 문제의식이 오늘날까지도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젊은 세대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로 인한 침체라는 현상은 지금이나 일제시대 때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그 표면적인 원인과 환경은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가령 ‘환경’의 차이를 보자. 현재 한류는 이식된 문화에서 세계적으로 유력한 콘텐츠로서 각광받고 있다. 반면 카프 당시에는 근대소설의 유무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애초에 이상이라는 게 없을 뿐더러 생존하기에도 바쁘지만 당시에는 광복이라는 이상이 있었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닿을 리 없는 별을 향해 손을 뻗고자 했다.


그 결론은 그러나 동일한 무기력이다. 실천보다 외면이거나 혹은 그조차도 사치인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슬롯가 언제나 이렇게 마비 상태였던 것은 아니었다. 혁명에 혁명을 연이은 격동을 겪었으며 권위주의 군사독재 정권과의 치열한 사투 끝에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젊음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는 그 위치가 역전되었지만 말이다. 정치 기득권 세력 중 다수는 이 시절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지만 지금은 586세대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일제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독재정권도 타도했다. 탄핵도 여러 번 했다. 그럼에도 청년 자살률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악화되고 있다. 왜 그럴까? 『우상의 파괴』라는 데뷔글로 유명한 한국 비평계의 거목 고 이어령 선생의 「병영화 시대의 예술가」에 따르면 현대 한국슬롯를 병영이라고 말한다. 병영이란 것은 생활 그 자체가 아니다. 생활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이내 자라나 그 안의 생의 공간까지 잠식해버린다. 즉 목적의 언어가 실종되고 수단의 언어만이 증대된다.


병영과 시장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왜’를 묻지 않고 ‘어떻게’를 묻는다. 오늘날 젊은 이들에게 ‘어떻게’를 요구하고 나름대로 제시해주려는 어른들도 있다. 물론 그들의 성의는 감사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왜’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다. 도구에게 ‘왜’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 없으면 대체되기에,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빠르기에, 자기 일에 열정 페이를 하면서까지 삶을 소모하려는 이는 오늘날 아무도 없다.


목적과 수단의 의미는 칸트적이라든가 현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어령의 글에도 나오듯이 ‘새로운 슬롯적 이미지의 창조’에 관한 것이다. 본래 시대정신이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이 ‘왜(why)’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시대의 이 ‘왜’의 재정립은, 즉 목적의 재정립은 그 개념 자체의 정립에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중의 문제이다. 이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난 후로부터, 어쩌면 서구 슬롯의 실존주의가 붕괴하던 순간부터 있었던 모더니즘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서구문명의 수용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르네상스, 한류는 이런 현상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임화의 이식문학론에 따르면 한류는 분명 전통을 발전시킨 유산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형식적인 면에서 그러하다. 한류는 문화자본의 혼합체이며 신자유주의 속에서 대중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판매하는 수단일 뿐이지, 이데올로기로서 ‘왜’의 궁극적인 단초를 제공하지 못한다.


UN에서 BTS가 연설을 했다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이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국제 영화제에서 아카데미상을 받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들리더라도 그것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같은 바카라의 「저항문학의 종언」에서 이어령은 카스트로를 호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침묵할 때 저 숲속의 새들도, 하늘의 별도 침묵한다. 모든 사랑이 침묵한다.”


광화문에서만 형광봉을 흔들지 말자. 거대담론을 말하며 혁명으로 점철되어 온 역사에서 새 시대의 유산을 이끌어내자. 펜을 잡아라.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고통받으며 또한 의심하는 이여!!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는 법이다.

image.png


이전 20화광복절, 카프KAPF와 임화를 다시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