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슨 인 메모리엄 54: 신에 관하여

bywinterfyellb

54

오, 그러나 우리는 그 경로는 모르나

왠지 선이 악의 최종 목표임을 믿으리

천성적으로 아픈 것, 의지의 죄,

의심의 결함, 피의 얼룩임을.

목적없는 발로 걷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의 목숨도 파괴되거나

쓰레기처럼 공허하게 버려지지 않는다

신이 그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셨기에,

벌레 하나도 헛되이 잘릴 수 없다.

나방도 헛된 욕망으로

덧없는 불길에 타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득이 되도록 쓰이지는 않는다

(일부 발췌)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신에 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이는 곧 인간이 시몬 베유를 여기서 인용한 것처럼 ‘주의 attention’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란 바라보기다. 포식하듯이 감각을 소비하는 현대인들은 사물의 실상을 바라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멀어 종교적 경험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관조적 주의는 어떠한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자신의 자아를 공백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는 신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직 수동적으로 기다릴 뿐이다. 무위하는 자는 신성하다. 행동하는 무위라고 이러한 사유를 한병철은 정의내린다. 우리 자신을 무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덜어내고 덜어낸다. 그것이 유일한 ‘행동’ 이다. 우리는 언제나 somebody가 되려고 하지만 한병철은 우리가 nobody가 되어 수동성을 띈 사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없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란스러운 자본의 도구와 달리. 마치 십자가에서 희생한 신의 아들과 같이 인간도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맹목적으로 섬겨야 한다.


순종, 비워냄, 섬김, 희생. 다 좋은 가치들이다. 하지만 나는 한병철의 ‘관조적 주의’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몬 베유는 플라톤주의자이므로 이데아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부분 그리스도교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과 최고선의 목적론적 추구를 차용했다. 가령 바오로의 코린토 1서 9장 24절~27절만 보아도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화한을 얻으려고 달리고, 허공을 치는 서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는다. 복음의 선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


성경 말씀에서만 그리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칸트의 선의지는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선의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추구되어야 한다. 진화론이 18,19세기에 세상을 뒤흔든 것은 ‘자연(이성’이 결과론적이었던 것이지 활동이나 ‘자유’에 의한 것이 아닌 유전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자연’은 경향성에 불과하다. 칸트는 이성이 뇌에 종속되어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전히 근거로서의 의지, 그것이 이성이다


이와 같이 선의지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욕이다. 사람이 움직이게 하되 다만 이는 에로스에도 로고스에도 종속된 것이 아닌 목적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예수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에 의한 것이다.


이에서 더 나아가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vita active)를 관조와 대비시킨다. 이러한 활동적 삶의 요건은 행위를 통한 탄생성이다. 인간의 조건은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 작업하는 호모 파베르이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할 때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했지 변혁하지 못했다고 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잊고 말한 듯하다. 내가 <<신을 찾는 뇌>> 서평에서 언급한대로 그리스도교는 하향식 복종이 아닌 상향식 헌신이다. 이러한 종교가 한때 국가권력의 도구가 된 적도 있었지만 본래 그리스도교는 황제를 위협했던 혁명이었다.


테니슨이 시 54번에서 아름답게 표현했듯이 선은 우리의 불완전성(악)의 최종경로이며 이 도정에서 어떠한 피조물도 헛되이 버려지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두 예수의 형제로서 불렸다. 관조하는 자는 기다릴 뿐이지만 예수에게 기적과 치유를 청했던 이들, 폭풍우 속에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나사로의 누이등 복음서의 등장인물들 중에 예수를 찾아나섰다면 찾아나섰지 절름발이나 병자가 아니고서야 그분을 기다리기만 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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