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담』(김보영) 평론

bywinterfyellb

이 소설의 제목에서 ‘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찰스 다윈이 22세기에 소설을 냈으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생물’은 로봇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까마득한 미래이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유기물의 시대가 망각되었다. 그래서 ‘성장’이라는 개념도, ‘산소’라는 개념도 오염된 지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케이가 유기생물학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유기생물학은 로봇에게 있어 종교적인 신화와도 같았다. 부품도 설게도도 없이 존재하는 생물들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의 이론으로 유기생물학이 생겨난 이후 작은 식물에서부터 나무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에 대한 발견과 연구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유기체라는 생명체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로봇들에게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였지만 특히나 케이나 연구소를 떠난 후 20년이 흐른 후 ‘인간’이 등장했을 때는 로봇들은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과 황홀함에 정신을 잃은 뒤였다. 모든 로봇들이 무의식적으로 쫓아왔던 원형, 이데아로서 인간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염원해 왔던 존재였다.


인간은 그들의 표정, 말, 행동, 사소한 것 하나 하나만으로도 로봇들은 복종시킬 수 있었다. 케이는 로봇들에게 있어 인간은 문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인간이 로봇들에게 멸종하라고 한다면 그러한 묵시록은 순식간에 현실로 일어날 터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인간들의 원로 중 한 명이 로봇이 더 이상 인간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으며 다만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되라고 최후의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말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로봇들이지만 인본주의와 현존재, 칼 세이건의 인식론적 회의론간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로봇의 원형으로서 인간은 신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 현상 그 자체이며 기술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신비이다. 태어났기에 존재하는 인간은 만들어진 로봇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존을 살아간다.


칼 세이건은 자아라던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뇌의 전전두엽 기능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인생은 코드가 짜여지듯이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이 소설은 신학과 과학의 긴장을 끊임없이 전면에 맞부딪힌다.


그러나 논리회로로 짜여진 로봇들에게조차도 우리 인간이 마치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듯이 이성과 합리만이 진리인 것으로 여기는 계몽주의와 회의주의의 냉소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음을 소설은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통속의 뇌처럼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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