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얼마나 엄마를 기다렸을까
주말 모임에 가면 초등학교 2학년 아라가 있다.
아라는 말한다.
“안 놀 거야.”
그러면서도 내 품에 폭 안긴다.
나는 그 작은 등을 오래 안아준다.
어쩌면 나는 그 아이를 안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엄마’라는 시간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아들이 있다.
엄마의 부재 속에서 자란 스물아홉 살 아들.
며칠 전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은 대번에 말했다.
“이제는 제가 열심히 살게요.”
그 말을 듣고 한참 생각했다.
열심히 산다는 건 무엇일까.
최선을 다한다는 건 정말 좋은 말일까.
나는 오랫동안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믿었다.
사무실에서 성과를 내고,
조직에서 인정받고,
남보다 조금 더 앞서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최선인 줄 알았다.
중요한 자리에 앉으면 중요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중요한 정보를 알면 삶도 조금 더 단단해지는 줄 알았다.
밤을 새워 일했고, 인정받고 싶어 애썼다.
그 시간 동안 아들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일했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아플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친정엄마였다.
아들이 지방대에 입학했을 때
나는 그것도 학교냐며 아픈 말을 했다.
그 아이가 어떤 시간을 건너왔는지,
어떤 외로움을 삼키며 컸는지
나는 다 알지 못했다.
내가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정엄마는 아들에게 등록금 500만 원을 쥐여 주며 학교에 가라고 했다.
엄마는 그 아이를 막내아들처럼 길렀다.
스무 해 넘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정을 쌓았다.
나는 일꾸러기였고,
엄마는 정꾸러기였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이 그토록 억울했을까.
왜 그렇게 성공하고 싶었을까.
왜 인정받는 일이 사랑받는 일보다 먼저였을까.
다 와서 보니 알겠다.
최선은 최선이 아니었다.
최면이었다.
조직에서 인정받으면 삶도 인정받는다는 최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행복해질 거라는 최면.
성공하면 모든 결핍이 보상될 거라는 최면.
그 최면에 걸려 있는 동안
나는 가장 오래 기다린 사람을 놓쳤다.
아들은 얼마나 엄마를 기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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