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19/365)
시스템이 나를 데려다준다 — 0편: "왜" 없이도 걸을 수 있다
시스템이 나를 데려다준다 — 4편: 의지에 기대지 않는 법
시스템이 나를 데려다준다 — 6편: 평범함의 조합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건 얼마나 어려울까.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 최고의 작가, 최고의 디자이너. 상위 1%에 들려면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운까지 필요하다. 수만 시간을 투자해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 방향을 권유받는다. 한 우물을 파라. 전문가가 되어라. 한 가지를 끝까지 해라.
스콧 애덤스는 완전히 다른 길을 제안한다. 한 분야에서 상위 1%가 되는 대신, 두세 분야에서 상위 25%가 되라고. 그 조합이 독보적 가치를 만든다고. 그는 이걸 '스킬 스태킹'이라 불렀다.
애덤스 자신이 가장 좋은 예시다. 그는 최고의 만화가가 아니었다. 그림 실력만 놓고 보면 더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았다. 최고의 유머 작가도 아니었고, 경영 전문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만화를 그릴 수 있고, 유머 감각이 있고, 기업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세 가지가 만나서 딜버트가 태어났다. 각각은 평범했지만, 조합은 비범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위안이 됐다. 나도 뭔가 하나를 압도적으로 잘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위안을 넘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내 안에서 이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제품을 만드는 PM이다. 최고의 PM은 아니다. 글을 쓴다. 최고의 작가는 당연히 아니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있다. 학자 수준은 아니다. 팀을 이끌어본 경험이 있다. 탁월한 리더라고 자신하긴 어렵다. 하나하나 떼어놓으면 다 "그럭저럭" 수준이다. 그런데 "제품 감각이 있고, 글로 정리할 수 있고, 동양철학의 프레임으로 사고하고, 팀 운영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조합이 나만의 결을 만들고 있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살다 보니 쌓인 거다.
스킬 스태킹이 재미있는 건 산술이 아니라 화학이라는 점이다. 1+1이 2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서 예상 못한 것이 나온다.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디자이너는 그냥 디자이너와 일의 폭이 다르다. 글을 쓸 줄 아는 엔지니어는 기술 문서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생각을 구조화하는 능력 자체가 달라진다. 심리학을 이해하는 마케터는 사람의 행동을 다른 층위에서 볼 수 있다. 각각의 스킬이 다른 스킬을 증폭시킨다.
"만드는 사람들의 협업법" 1편에서 팀의 조합을 이야기했었다. 최고의 개인을 모으는 것과 최고의 팀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고. 요리에서 최고급 재료를 한꺼번에 넣는다고 맛있는 음식이 되지 않는다고. 그때는 팀에 대해 쓴 건데, 개인에게도 정확히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내 안에서 여러 스킬이 하나의 팀처럼 작동하는 거다. 서로 다른 시선이 하나의 판단 안에서 만나는 것. 그래서 "한 우물을 파라"는 조언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다. 여러 우물을 얕게 파되, 그 우물들 사이에 지하수로를 연결하는 것도 전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무 스킬이나 쌓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를 강화하는 조합을 찾아야 한다. 애덤스도 이걸 강조한다. 어떤 스킬은 다른 스킬과 만났을 때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고, 어떤 스킬은 아무리 쌓아도 따로 놀기만 한다. 그는 특히 글쓰기, 심리학 이해, 대화 기술, 기본적인 비즈니스 감각을 거의 모든 것과 시너지를 내는 범용 스킬로 꼽았다. 이 스킬들은 무엇을 하든 바닥에 깔리면서 다른 전문성의 효과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왜 범용 스킬인지, 나는 체험적으로 안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된다. 제품 기획서를 쓸 때도, 팀에 피드백을 줄 때도, 전략을 세울 때도 결국 하는 일은 생각을 구조화해서 글로 옮기는 것이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단순히 문장이 예쁘다는 게 아니라, 복잡한 것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건 PM이든 엔지니어든 디자이너든 거의 모든 역할에서 핵심 역량이 된다. 이 시리즈의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스템이기도 하고.
심리학 이해도 마찬가지다. 사용자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려면 심리학이 필요하고, 팀원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려면 심리학이 필요하고, 자기 자신이 왜 이런 패턴에 빠지는지 이해하려면 심리학이 필요하다. 4편에서 트리거와 디폴트를 이야기한 것도 결국 행동 심리학의 원리다.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이해만 있으면 모든 영역에서 판단의 질이 올라간다.
스킬 스태킹과 시스템은 어떻게 연결될까. 사실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시스템이 하나씩 쌓이면 스킬도 하나씩 쌓인다. 매일 글을 쓰는 시스템이 돌아가면 글쓰기 스킬이 쌓인다. 매일 운동하는 시스템이 돌아가면 체력이라는 인프라가 쌓인다. 매주 바카라을 읽는 시스템이 돌아가면 사고의 프레임이 넓어진다. 하나하나는 소소한 시스템이지만, 이것들이 함께 돌아가면서 서로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글쓰기가 사고를 정리해주면 일의 판단이 좋아진다. 판단이 좋아지면 일이 잘 풀리고, 일이 잘 풀리면 에너지가 올라간다. 에너지가 올라가면 운동을 나가게 되고, 운동을 하면 몸 상태가 좋아지고, 몸 상태가 좋으면 글이 더 잘 써진다. 개별 시스템이 따로 돌아가다가 어느 순간 서로 연결되면서 선순환이 생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주고, 밀려난 것이 또 다른 것을 밀어주는 복리 효과.
물론 이 반대도 성립한다. 하나가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다른 것도 흔들린다. 운동을 안 하면 에너지가 떨어지고, 에너지가 떨어지면 글이 안 써지고, 글이 안 써지면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그래서 5편에서 이야기한 복구 장치가 중요하다. 전부 무너졌을 때 전부를 한꺼번에 다시 세우려 하면 압도당한다. 하나만 다시 켜면 된다. 가장 작은 것 하나. 그 하나가 돌아가면 나머지가 따라 돌아가기 시작한다.
애덤스가 말한 것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모든 스킬은 성공 확률을 두 배로 올린다." 과장일 수 있지만, 방향은 맞다. 한 가지를 극한까지 갈고닦는 것도 길이지만, 여러 가지를 적당히 익혀서 나만의 조합을 만드는 것도 길이다. 후자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에게는 더 현실적이고, 어쩌면 더 강력하다. 세상에 나 같은 조합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 그 유일함이 곧 가치가 된다.
지금까지 시스템의 연료(에너지), 크기(최소 시스템), 환경(트리거와 디폴트), 회복력(앞으로 넘어지기), 그리고 조합(스킬 스태킹)을 이야기했다. 다음 편에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보겠다. 시스템은 결국 어디로 나를 데려다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