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13/365)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58: 귀찮음에 관한 소고 에 이어서
시스템이 나를 데려다준다 — 0편: "왜" 없이도 걸을 수 있다
2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 귀찮으면 하거나 무시하기. 그때는 그게 대단한 발견처럼 느껴졌었다. 박진영 씨 이야기를 빌려서 "왜"를 찾으면 할 수 있다고 썼고, 슬램덩크의 대사를 빌려서 이번엔 진짜라고요, 라고 했다.
그래서 2년이 지난 지금, 그게 어떻게 됐냐면—의외로 잘 됐다.
"귀찮으면 하기"는 생각보다 강력한 원칙이었다. 귀찮은 일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줄었고, 줄어든 고민만큼 실행이 늘었다. 작은 일들이 쌓이면서 삶이 조금씩 움직였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2년 전의 나보다는 분명히 앞으로 와 있다.
그런데 정직하게 말하면, 한 가지가 좀 이상하다. 원래 글에서 나는 "왜가 분명하면 할 수 있다"고 썼다. 박진영 씨의 이야기가 그랬으니까. 아 배고파, 아 죽겠다—그래도 왜를 알면 버틸 수 있다고. 그런데 2년 동안 실제로 일어난 일을 돌아보면, "왜"는 선명해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달에는 확실히 보였고, 어떤 달에는 안개 속이었다. 그런데도 "귀찮으면 하기"는 작동했다. "왜"가 흐릿한 날에도 설거지는 했고, 글은 썼고, 운동은 나갔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한동안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2년 전의 나는 순서를 잘못 놓았던 것 같다. "왜"를 찾으면 할 수 있다—이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맞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왜"가 먼저가 아니었다. 행동이 먼저였다. 시스템이 먼저였다. "귀찮으면 하기"라는 단순한 규칙 하나가 "왜"보다 먼저 나를 움직였고, 움직이다 보니 가끔 "왜"가 보이는 순간이 왔다. 그리고 다시 흐려졌다. 그리고 또 움직였다. 그 반복.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걸 정확히 같은 말로 해둔 사람이 있었다. 딜버트를 만든 스콧 애덤스. 그는 이렇게 썼다. "목표는 패배자의 것이고 시스템은 승리자의 것이다." 또 "열정은 허상이다"라고도 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좀 과격하다고 생각했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맞는 말이다.
20킬로를 빼겠다는 건 목표이고, 매일 운동하는 건 시스템이다. 목표는 달성하면 공허하고 실패하면 좌절하지만, 시스템은 그냥 매일 돌아간다. 열정이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돌아가다 보면 가끔 열정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2년 전의 나는 박진영 씨의 이야기를 통해 "왜"를 찾으려 했다. 그건 목표 프레임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나를 움직인 건 "귀찮으면 하기"라는 시스템 프레임이었다. 박진영 씨의 이야기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그분에게는 그게 맞는 거다. 다만 나에게는 순서가 달랐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삶의 목표라는 게 딱히 없다. 거창한 비전이나 5년 후의 내 모습 같은 건 그려본 적이 없다. 예전에는 그게 좀 불안했다. 주변을 보면 다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면접에서도, 술자리에서도 "너 앞으로 뭐 하고 싶어?"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뚜렷한 답이 없는 게 게으르거나 무바카라임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2년을 지내보니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목표가 없어도 시스템이 방향을 만들어줄 수 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산바카라도 걸음이 쌓이면 어딘가에 도착한다. 도착하고 나서 돌아보면 "아, 여기에 온 거구나"를 알게 되는 거지, 처음부터 여기를 목표로 정한 게 아니었다. 애덤스의 말을 빌리면, 운이 나를 찾아올 확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기회를 관리한 것.
원래 글에서 인용했던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고정된 "나"가 없다면, 고정된 "나의 목표"를 세우는 것도 어쩌면 허상이 아닐까. 매 순간의 행동에 충실한 것. 선불교에서 말하는 운수반시(運水搬柴), 물 긷고 나무 하는 것이 곧 도(道)라는 이야기. 시스템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과 닮아 있다. 거창한 깨달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지금 앞에 있는 것을 반복하는 것.
다만—여기서 솔직해져야 한다. 이걸 깨달았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니다.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과 좋은 시스템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귀찮으면 하기"는 좋은 출발이었지만, 그건 한 줄짜리 규칙이지 시스템이 아니다. 시스템이라면 에너지를 관리하고, 환경을 설계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피드백으로 조정하는 구조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이 시리즈에서는 그 구조를 만들어가 보려 한다. 목표와 시스템의 차이, 에너지라는 진짜 연료, 단순하게 시작하는 법, 의지에 기대지 않는 환경 설계, 실패를 시스템 안에 넣는 법, 그리고 평범한 스킬들의 조합이 만드는 비범함까지. 완성된 매뉴얼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될 거다.
2024년에는 "귀찮으면 하기"라는 원칙을 세웠다. 그게 작동했다. 2026년에는 그 원칙을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중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2년 전에 배운 게 있다. 완성되지 않아도 일단 시작하면 된다는 것. 그러니 이번에도 일단 시작한다. 이번엔 진짜라고요—이 말, 또 쓰게 되네. 근데 매번 진짜인 거 맞다. 그때도 진짜였고, 지금도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