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칠판 앞에 서 있다가 내가 먼저 지워졌다

by선비천사

운동장에 아이들이 떠난 뒤
그림자들만 남았다
나는 그것들을 모아
규격 봉투에 담는다


누군가 칠판 가득 적어둔 낮의 문장들은
종이 울리고 나면 힘을 잃는다

분명 뜨거웠던 말들이었는데
바닥에 떨어지면
그저 검은 가루다


오늘도 아이 하나가
분필을 괜히 부러뜨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평선이 붉은 톱날을 세워
하루의 끝을 잘라낸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스며 나오는 건
피가 아니라
오래 묵은 침묵이다


내 몸의 노을도

이제야 조금 기울기 시작한 걸까


서까래처럼 버티던 무릎이
하루의 무게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오래 쥐고 있던 분필 가루는
어느새 손등에 내려앉아
검버섯이 되어
빛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이제 세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비어 있는 채로
조용히 부서진다


빛이 사물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했다고 믿었던 시간은 지나갔다
그건
곳곳에 흩어진 고독을
잠시 덮어두던 얇은 막이었을 뿐


검은 커튼이
모든 윤곽을 거두어 간 뒤에야


나는 비로소 안다


비워진 것은
교실이 아니라
내 안쪽이었다는 걸



*같이 보면 좋은 글

봄은 노랗게 온다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