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분분히 지는 밤, 나는 연필의 허리를 깎는다

by선비천사

창밖엔 꽃잎 분분히 지는 봄이 서성이고

나는 몽당연필의 허리를 깎아 밤을 깨웁니다

한 줌의 나무 가루가 바카라상 위에 쌓일 때마다

내 몸속의 서늘한 저녁도 조금씩 깎여 나갑니다


심장을 밀어 올려 날카로운 연필심을 세우면

종이 위엔 이름 모를 짐승의 발자국이 찍힙니다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은

문장 사이를 흐르는 나의 마른기침 소리


무릎을 굽혀 절을 올리는 대신

나는 나의 굳은살 박인 손가락을 믿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돋아나는

투명한 손톱 같은 비유들


당신은 어느 먼 곳의 빛입니까, 아니면

내 찻잔 속에서 식어가는 얼음의 비명입니까

나는 남은 연필의 짧은 몸뚱이를 쥐고

마지막 한 점의 온기를 종이 위에 옮깁니다


찬란한 이름들은 이미 바람의 몫

나는 다만 당신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하얗게 남겨진 고요한 흉터들을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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