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늙은 호박

by선비천사

거실 TV 선반 한쪽 구석, 아랫집 미용실 원장님이 오가는 길에 덤덤히 들려주고 간 늙은 호박 한 덩이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무심코 올려둔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묵직한 황금빛 존재감은 거실 전체의 공기를 그윽하게 눌러앉힌다. 넓적하고 둥그스름한 몸체, 위에서 아래로 깊게 파인 골, 서리를 몇 번이고 맞고서야 완성된 겉껍질의 투박한 질감. 어떤 정교한 조각품이나 도자기도 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덩치 앞에서는 인공의 장식물처럼 가벼워 보인다.


손바닥으로 그 단단한 등을 가만히 쓸어본다. 매끄럽지 않고 오돌토돌하게 올라온 표면은 오랜 세월 풍상을 견뎌낸 노인의 손등을 닮았다. 그러다 문득 옛말 하나가 떠올라 혼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호박같이 생겼다.” 대체 언제부터, 어떤 비틀린 시선에서 이 말이 사람의 못난 외모를 빗대는 말이 되었을까.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본 어느 자연인 프로그램의 잔상이 잔잔히 겹쳐진다. 산중에 사는 이가 밭두렁에서 막 따온 노란 호박꽃의 수술을 조심스럽게 다듬고, 그 여린 꽃주머니 속으로 다진 채소와 고기를 채워 넣은 뒤 가마솥에 쪄내는 장면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가마솥뚜껑을 열었을 때, 노란 꽃잎 사이로 은은하게 배어 나오던 풋풋한 호박의 향기. 꽃마저도 고운 그릇이 되어 맛과 멋을 품어내는데, 하물며 그 열매를 향해 던져진 옛사람들의 야박한 평가는 참 묘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옛사람들의 미적 기준이라는 것도 참으로 역설적이다. 과거 가난과 기근이 일상이던 시절, 삐쩍 마른 몸보다는 살집이 넉넉하고 이목구비가 동글동글한 인상을 덕성스럽다며 으뜸으로 쳤다. 그런데 똑같이 둥글고 통통한 호박을 두고는 ‘호박 같다’며 흉을 본다.


아마도 호박이 가진 지나친 친근함과 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갈한 화단이 아니라 담벼락이나 밭두렁에서도 아무렇게나 줄기를 뻗고, 잘 보살펴주지 않아도 거침없이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귀한 것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의 눈에는 하찮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민초들의 흙먼지 묻은 바지자락 곁에서 묵묵히 뒹굴었다는 이유로 얻은 억울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살아온 날들을 가만히 되짚어보며 세상과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 지금의 내 눈에는, 호박만큼 제 모습을 온전히 완성해 내는 열매도 드물어 보인다. 겉모습으로 가치를 다투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고유한 속도로 익어가는 모습이 자못 미덥다.


여름날 밭두렁을 따라 청량하게 뻗어 나가는 애호박을 보라. 연초록의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애호박은 사치스럽지 않다. 된장찌개에 툭툭 썰어 넣으면 국물의 깊이를 더하고, 얇게 채 썰어 노릇하게 전을 부쳐내면 특유의 달큼함으로 투박한 시골 밥상을 풍성하게 채운다. 가뭄이나 비바람 속에서도 마디마디마다 야무지게 열매를 맺어내는 솔직함은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그리고 계절이 깊어가고 찬 서리가 내릴 때쯤, 잎이 다 시들어 흙으로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는 늙은 호박은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준다. 뜨거운 땡볕과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겉껍질은 단단해져 속을 지켜내고, 속살은 비단처럼 고운 주황빛으로 여문다. 푹 고아낸 호박죽 한 그릇이 추운 겨울날 지친 몸을 녹여주듯, 늙은 호박은 자신이 견뎌낸 세월을 마침내 누군가의 온기로 내어준다.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청량하여 귀하고, 늙은 호박은 늙은 대로 진중하여 멋지다. 제 계절을 성실하게 지나며 가치와 쓰임을 겉과 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존재. 제 몫을 다한 존재 앞에서는 함부로 못생겼다 말할 수 없다.


화려함은 금세 시들지만, 묵직한 깊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롯이 드러나는 법이다. 세상은 여전히 매끄러운 겉모습과 화려한 색채로 사물의 가치를 조급하게 매기곤 하지만, 선반 위의 늙은 호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다움이 머무는 자리를 비로소 가늠하게 된다.


치열했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 나 역시 인생의 가을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도 늙은 호박의 깊은 골처럼 어느새 내 얼굴과 마음에 남아 있다. 섣부른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제 안을 다부지게 채워 넣은 저 호박처럼, 나 또한 내 남은 계절을 제 속도로 채워가고 싶어진다.


오늘 밤, TV 선반 위의 늙은 호박이 유난히 잘생겨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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