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귀의 사랑

by선비천사

베란다 창틀에 연둣빛 사마귀 한 마리가 정적처럼 얹혀 있다. 날이 선 앞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모서리에 바짝 엎드린 몸짓이, 마치 자기 몫의 계절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듯 위태롭고 단단하다. 유리창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그 작은 몸을 들여다본다.


가을이 깊어지면 곤충의 세계에는 서늘한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교미를 마친 암컷 사마귀가 수컷의 머리를 물어뜯어 먹는 현상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 장면에 잔혹함이나 비극이라는 감정의 이름을 붙여왔다. 그러나 렌즈를 바짝 대고 들여다본 그곳엔 어떠한 신파도 없다. 머리가 먹혀 들어가는 순간에도 수컷은 교미의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뇌가 사라진 자리에서 몸의 신경계가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다하며 씨앗을 건네는 것이다.


수컷이라고 왜 살고 싶지 않겠는가. 암컷의 시야를 피해 등 뒤로 신중하게 다가가고, 일이 끝나면 멀리 튀어 도망치려 애쓴다. 붙잡힌 수컷의 몸은 결국 암컷의 배를 채우고, 그 영양으로 영글어간 수많은 알들은 이듬해 봄 들판을 다시 연둣빛으로 채운다. 그것이 희생인지, 다만 생존과 번식이 맞물린 자연의 방식인지 사마귀는 말해주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은 이토록 차갑고 투명하다. 한 생명의 소멸이 다른 생명의 양분이 되고, 사라진 몸의 일부가 아직 오지 않은 계절로 건너간다. 거기에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생명이 생명에게로 이어지는 묵직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오래전, 바카라상 위 원고지 칸칸마다 낱말을 골라 넣고 문장을 깎아내던 밤들이 떠오른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깨는 무거워지고 눈시울이 매캐해졌지만, 나는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줄어드는 그 서늘한 감각을 사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를 조금씩 소모하는 일이었다. 나라는 존재의 일부를 지워가며 문장을 만들고, 그렇게 태어난 글은 바카라이라는 옷을 입고 내 손을 떠나갔다. 내가 조금씩 지워져 간 자리에서 비로소 한 편의 글이 태어난 셈이다. 나를 깎아 타인에게 내어주는 그 무던한 작업은, 소멸하면서도 다음 생을 남기는 사마귀의 생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해 질 녘 산바카라길, 골목 너머 놀이터를 지나다 보면 멈춰 선 그네만 가만히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일이 예전보다 드물어진 길목을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을 쓴다. 누군가를 위해 내 몫을 덜어내고, 아직 오지 않은 다음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는 듯하다. 나를 비워 타인을 채우는 본능의 고리가 조금씩 헐거워져 가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그러나 핏줄을 이어받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어놓는다.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흙을 일구고, 누군가는 나무를 심으며, 또 누군가는 종이 위에 자신의 사유와 온기를 차곡차곡 적어 내려간다. 내 몸에서 비롯된 생명이 아닐지라도, 내가 세상에 건넨 문장 하나가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씨앗으로 떨어져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면, 어쩌면 인간은 그런 이어짐을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창밖의 노을이 붉게 젖어든다. 어둠이 오기 직전의 하늘은 남은 빛을 한꺼번에 쏟아놓는다. 창틀의 사마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오래 바라보다가 가만히 창문을 닫는다. 언젠가 내 손을 떠난 문장 하나도 저 작은 몸처럼 어디엔가 가만히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마음 한쪽에서 한 철을 견디고, 다시 작은 무엇으로 살아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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