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곡지, 연잎에 고이는 소리

by선비천사

광복절 대체휴일의 아침, 하늘은 낮게 가라앉은 은빛 모시옷을 입고 있었다. 여름의 가팔랐던 기세가 서늘한 빗줄기에 한풀 꺾였다. 빗줄기는 이내 정수리를 적셨다. 젖은 옷자락을 느끼며 아내와 함께 관곡지(官谷池)로 향했다. 관곡이라는 지명을 입안에서 굴려본다. 벼슬 관(官)에 골짜기 곡(谷). 그 뜻과 유래를 떠나, 내게는 세속의 소란에서 한 걸음 비껴 난 골짜기처럼 아늑하게 들렸다.


연밭 입구에 다다르자 대로변을 따라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차를 세우기까지 길 위를 얼마간 맴돌아야 했지만, 차창을 열자 흘러드는 풀 내음과 젖은 흙냄새에 조급함이 이내 가라앉았다.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연밭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며 짙은 초록빛 연잎들과 어우러졌다.


연밭은 사방으로 넓게 열려 있었다. 잔잔히 내리는 빗물 아래, 넓적한 연잎들은 저마다의 오목함으로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었다. 연잎은 제 품에 물이 차오르면 무리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동그랗게 모인 물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할 즈음, 잎사귀는 고개를 숙여 물을 땅으로 흘려보낸다. 비우고 다시 받아들이는 그 담담한 경쾌함. 연잎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마다 낮게 깔린 하늘의 빛깔이 투명하게 비쳐 들었다.


관곡지의 연밭은 단조롭지 않아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조선 세조 때 강희맹 선생이 가져와 뿌리를 내렸다는 ‘전성홍련’의 담백한 홍빛부터, 눈이 부시게 깨끗한 백련과 수면 낮게 엎드린 수련, 잎사귀마다 가시를 세운 가시연까지, 저마다 다른 높낮이와 모양새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흙길 모퉁이를 돌 때였다. 발밑에서 기척이 느껴져 걸음을 멈추었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빗물 고인 둑가에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사람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고개를 들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제 일상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 오래된 이웃처럼 친근했다. 경계가 사라진 그 정적 속에서 빗방울이 연잎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연못 깊은 곳에 피어난 연꽃을 들여다본다. 생전에 어머니는 나를 품에 가졌을 때,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품에 안는 꿈을 꾸셨다고 하셨다. 어릴 적에는 그 말이 아득한 전설처럼 들렸으나, 삶의 굽이굽이를 돌아온 지금에야 그 꿈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어머니가 품었던 것은 단순히 어여쁜 꽃 한 송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가며 겪었던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어쩌면 내 가슴속에 은밀히 뿌리내리고 있던 어머니의 그 조용한 태몽이었을지 모른다.


비 내리는 관곡지 연밭에서 아내의 젖은 우산자락을 다독여 잡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꽃들이 낮은 고개를 숙이며 빗물을 털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를 세우느라 겪었던 불편함이나 대로변의 소란스러움은 까마득한 기억 너머로 물러났다. 눈앞에는 오직 비를 맞으면서도 제 오목함만큼 물을 모았다가 기꺼이 비워내던 연잎과, 발밑을 스쳐 가던 청둥오리의 여유, 그리고 나를 세상에 내어놓으신 어머니의 따뜻한 품만이 잔잔하게 남아 있었다. 세월의 계절이 어디로 흘러가든, 나는 오늘 관곡지의 연잎처럼 제 무게만큼 다정하게 세상을 담아내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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