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되어 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일

by선비천사

노화되어 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하고도 잔인하다. 젊은 날에는 늙음이 마치 당도하지 않을 먼 이국의 계절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직은 내 삶의 지평선 너머에 머물러 있는 미래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은 발소리를 숨긴 채 사람의 뼈와 살 속으로 스며든다. 어느 날 문득 늘 걷던 길의 나지막한 경사에서 숨이 가쁘고, 서재의 바카라을 읽기 위해 팔을 멀리 뻗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은 그 사소한 순간에 시간의 손길을 실감한다. 노화는 거대한 해일이 아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가랑비들이 몸의 안쪽을 적셔온 누적의 결과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삶의 탄력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무게를 실제로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라는 구체적인 생의 이면에는 불쑥 찾아오는 질병의 공포가 있고, 해 저문 거실을 채우는 지독한 적막이 있다. 그것은 생일 케이크 위에 꽂히는 화려한 초의 개수가 아니다. 한 인간이 지나온 시간의 밀도이며, 홀로 견디어 낸 겨울들의 서늘한 무게다.


젊은 시절의 몸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밤을 새워 무언가에 몰두해도 다음 날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낼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영원히 지금의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몸은 점차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처진다. 비가 오려하면 무릎이 먼저 흐린 하늘의 냄새를 알아채고, 어깨는 젊은 날 짊어졌던 가장의 무게를 기억해 낸다. 식탁 한쪽에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은 알록달록한 약봉지들은 정직하게도 지나온 세월의 청구서를 내밀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늙음은 모든 것을 빼앗기만 하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는 속도만큼 세상의 중심에서 서서히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일에 익숙해지는 지혜도 함께 온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려 애썼고, 내 목소리가 세상에 가닿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전화벨은 뜸해지고, 함께 뜨겁게 삶을 논하던 이들은 각자의 섬으로 흩어진다. 관계의 잎사귀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적막만이 남는다. 괜히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놓는 저녁, 나 역시 지나가는 이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그리워 동네 병원 창구 앞에서 일부러 걸음을 늦추는 노인들의 마음을 비로소 닮아간다.


노동의 힘을 잃어버린 이에게 경제적 위축 역시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어서는 가난해도 다시 시작할 시간이 무기였지만, 늙어서 마주하는 가난은 사람을 쉽게 초라하게 만든다.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바닥을 보이는데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병원비 계산서 앞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마트의 가판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일 때, 늙음은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 처연한 생의 분투가 된다. 누구나 공평하게 시간의 강을 건넌다고 하지만, 그 강가에서 마주하는 고통의 무게까지 공평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낸다. 이 모질고 적막한 시간 속에서도 끝내 삶을 붙잡아 두는 것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다. 손에 잡히는 지극히 사소한 애착들이다. 베란다의 작은 화분에 물을 주며 새로 돋아나는 초록 잎을 지켜보는 일, 아내가 담담하게 끓여 내온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마주하는 일,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가족의 안부 전화 같은 것들. 이 작은 일상들이 가라앉으려는 나를 다시 오늘 쪽으로 밀어 올린다.


어쩌면 노화란 단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 아니라, 비로소 내 삶의 유한함을 겸손하게 배워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느라 놓쳤던 풍경들,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들과 미처 용서하지 못했던 기억들을 이제야 천천히 뒤돌아보며 들여다본다. 거칠게 몰아치던 삶의 속도를 잃어버린 대신, 그 자리에 비로소 깊고 잔잔한 슬픔과 지혜가 고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늘어간 주름과 조금 굽어진 내 등 뒤로 내가 걸어온 삶의 풍경이 겹쳐 보인다. 노화되어 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결국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나를 슬퍼하는 일이 아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오늘을 살아내는 인간의 의지를 바라보는 일이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며, 그 늙어감의 흔적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치열하게 남기고 있는 가장 인간다운 품격이기 때문이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지워진 이름 위에, 다시 욕망을 쓴다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20화지붕을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