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밑바닥이 낮게 내려앉는다. 공기 속에 잠복해 있던 비릿한 흙내가 마당 가득 고이면, 이윽고 앞산의 능선마저 삼켜버릴 듯 맹렬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치 생의 한복판에 고여 있던 해묵은 한(恨)을 죄다 쏟아붓겠다는 기세다.
이럴 때면 나는 서바카라을 덮고 문득 하던 일을 멈춘 채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도심의 아스팔트를 때리며 흩어지던 비는 사람을 사납게 쫓아내지만, 흙과 기와를 적시는 이곳의 비는 사람의 마음을 더 깊숙한 내면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세월의 갈증으로 거칠어졌던 나무 결이 빗물을 머금으며 천천히 가라앉는다. 거세게 내리 꽂히는 빗줄기는 세상의 모든 경계선을 지워버린다. 마당은 금세 물빛으로 번졌다. 사방에 들어찬 하얀 물장막은 시야를 가두는 벽인 동시에, 나를 가두어 지켜주는 거대한 요새가 된다.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비만 바라본다.
빗줄기 사이로 신작로를 걸어가는 실루엣 하나가 포착된다.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우산도 없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종종걸음을 치는 사내다. 출퇴근길 지하철역이나 빌딩 숲을 가득 메우던 회색빛 인파의 기억들이 저 흐릿한 사내의 등 뒤로 겹쳐 흐른다. 도시의 인간은 제 속도보다 군중의 속도로 움직여야 했다. 그곳에서 소나기는 구두를 망치고 바지깃을 적시는 불청객이었으며, 노동의 피로를 더하는 습기에 불과했다. 사람은 그저 빗속을 뚫고 가야 하는 고단한 도망자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사선으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걷는 저 사내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다. 그는 거대한 대자연의 도화지 한가운데를 묵묵히 관통하는 하나의 점(點)이자 담백한 선(線)이다. 푸른 들판과 대지가 뿜어내는 하얀 물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외로운 실루엣은 그대로 고요한 풍경이 된다. 도시에서 부딪히던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기꺼이 스며드는 순간이다. 나는 그 풍경의 엄숙함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가만히 숨을 죽인다. 비는 그칠 기미 없이 더욱 세차게 쏟아진다.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물안개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대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뱉는 고백 같다. 그 뿌연 장막이 사방으로 번져나가자 세상의 현란했던 색채들이 순식간에 휘발된다. 오직 무채색의 짙고 옅은 음영만이 남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시끄럽게 채우고 있던 잡다한 상념들도 저 빗줄기 속으로 흔적 없이 숨어버린다. 허공으로 흩어져 끝내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던 말들이 거대한 빗소리 속으로 잠긴다. 매일같이 눈앞의 숫자에 연연하며 조급해하던 나의 유치한 시선도 빗줄기에 씻겨 내려간다. 거센 빗소리 속에서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워진다.
소나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나는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해방감을 맛본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올 사람도 없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 비의 장막은 외부 세상과 나를 연결하던 모든 통로와 부채 관계를 단번에 끊어놓았다. 누구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해 채비를 서두를 필요도 없는 상태. 세상은 지금 단 하나의 거대한 빗소리로 요동치고 있지만, 그 요동치는 폭풍의 한복판에서 나는 완벽한 진공(眞空) 상태의 고요를 경험한다. 홀로 쳐다보는 소나기는 외로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단독자(單獨者)의 든든한 고독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지를 난타하던 빗줄기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며 지붕 끝 낙숫물이 규칙적인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하얀 물안개가 서서히 걷힌 자리에, 비에 씻겨 선명해진 초록의 들판이 다시 눈을 뜬다.
소나기는 지나갔고, 내 마음의 마당 역시 군더더기 없이 비워졌다. 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래 비워두었던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