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버리고

by선비천사

엊그제 시작된 장마가 정오를 넘기며 아파트 유리창을 두드린다. 타닥타닥, 베란다 창이 잘게 떠는소리가 거실 가득 번질 때마다 창밖의 단지는 이내 흐릿한 묵화처럼 지워진다. 세상은 저마다의 하루를 비에 맞춰 조정하느라 분주하겠지만, 나는 이 세찬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시간이 싫지 않다.


보일러를 가볍게 돌려 바닥의 습기를 날려 보낸 거실은 보송하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세상의 폭우와 완벽하게 차단된 이 안락함이 문득 고마우면서도 생경하다. 주방에서 잘 익은 김치를 썰어 넣고 기름을 넉넉히 둘러 김치전 한 장을 부쳐낸다. 팬 위에서 반죽이 지글지글 익는 소리는 창밖 장대비와 묘하게 닮아 있다.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전 한 귀퉁이를 입에 넣는다. 입안에 퍼지는 시큼하고 고소한 맛을 음미하며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소록소록 피어난다.


돌이켜보면 유년의 비는 관조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왕복 4km가 넘는 시골 초등학교 등하굣길, 대나무 살에 초록색 비닐을 느슨하게 씌운 우산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뒤집히거나 살대가 부러지곤 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붉은 진흙물이 차오르고 바짓가랑이가 살갗에 축축하게 감기던 길. 논둑길 저편에는 도롱이를 뒤집어쓴 채 장대비 속에서 묵묵히 물꼬를 보던 농부들이 서 있었다.


하늘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던 해 여름에는 집 뒤편 산자락에서 붉은 토사가 마당으로 쓸려내려오기도 했다. 온 가족이 뛰어나와 비를 흠뻑 맞으며 삽을 들었다. 쏟아지는 빗물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지만, 황토물이 집안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땅을 파냈다. 비에 젖은 삼베 작업복은 몸에 무겁게 감겼고, 서늘한 빗물 사이로 비린 황토 냄새가 진동했다. 자갈 섞인 흙더미에 쇠삽날이 사각사각 박히는 소리 너머로 물길을 돌리라며 소리치던 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아랫집 방앗간이 물에 잠겨 온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모여들어 밤새 물을 퍼내던 날도 있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비라는 거대한 자연의 한복판에 온몸으로 던져진 채 살았다.


나이를 먹고 도시에 살면서 비는 베란다 창 너머로 감상하는 안전한 정물이 되었다. 몇 해 전 등산길에서 느닷없는 소나기를 만나 지갑과 휴대전화까지 흠뻑 젖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쾌하기보다 몸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창밖의 거대한 물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저 빗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기묘한 충동이 몸 안 어딘가 오래 잠들어 있던 나를 두드린다. 이제는 붉은 토사를 막으려 삽을 들 필요도 없고, 젖어버릴 가죽 지갑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방수 우비를 꺼내어 지퍼를 단단히 채우고, 가벼운 크록스 신발에 발을 밀어 넣는다. 안락한 거실의 보호막을 걷어내고, 나는 폭우의 한가운데로 문을 열고 나선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 서늘하고 묵직한 물공기가 허파 깊숙이 밀려든다. 아파트 단지 밖 보도블록 위로 완전히 첫발을 내딛는 순간, 우산 지붕을 때리던 소리가 내 머리와 어깨 위로 직접 쏟아지는 거대한 리듬으로 바뀐다. 크록스 신발의 둥근 구멍 사이로 시원한 빗물이 거침없이 흘러 들어오고, 우비 깃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이 뺨을 차갑게 적신다.


사방이 온통 물의 장막으로 가로막힌 거리를 묵묵히 걸어간다. 신발 바닥을 타고 발가락 사이로 차오르는 빗물의 촉감이 지극히 생생하다. 사소한 불편함조차 기피하며 안전함 속에 갇혀 있던 일상의 관성이 이 서늘한 마찰 속에서 부서진다. 쏟아지는 폭우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걸어가는 행위만으로도 어릴 적 빗속을 헤치던 소년의 야성이 깨어나는 듯하다. 비를 피해 실내에 머무는 삶도 감사하다. 그러나 가끔은 폭우를 정면으로 맞으며 걷는 일만으로도 잊고 지냈던 나를 다시 만나게 된다.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둔탁하게 어깨를 두드린다. 장마 한가운데서 나는 여전히 빗속을 걷고 있다. 발가락 사이를 스치는 빗물은 유난히 시원하다. 지붕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낡은 시간들이 씻겨 내려간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의미의 기하학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19화내 안의 철망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