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세서 뒤편에서

by선비천사

액정 위를 떠도는 목소리들이 날카롭다

이 집 저 집 담장을 넘으며

마른풀처럼 번져가는 소란들

나는 전원을 누르는 대신 시동을 걸고

소음의 끝단인 대부도 갯벌 앞에 멈춰 선다


글로브 박스를 뒤져 꺼낸 것은 시집이 아니다

지난달의 노동이 숫자로 박힌 급여 명세서

단단한 생계의 앞면을 뒤집자

그제야 하얀 빈칸 하나가 나타난다

나는 그 여백 위에 잉크를 꾹꾹 눌러 담는다


바람에선 눅눅한 소금 비린내가 난다

한때 뜨거웠을 삶의 찌꺼기들이

파도에 씻겨 하얗게 부서지는 동안

누가 누구를 흔들고 있는지 묻지 않기로 한다

정박한 고깃배가 제 몸을 파도에 부딪치며

비릿한 울음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수평선을 향해 오래 삼킨 말을 흘려보낸다

서로에게 닻을 내리지 못한 배들 위로

축축한 어둠이 묵직하게 내려앉고

철새들은 보이지 않는 길을 간다


이제 숫자들이 기다리는 앞면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주머니 속에는 짭조름한 문장 몇 줄이

아직 마르지 못한 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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