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무게를 재보려는 듯 외출은 늘 낮아진다
우울이라는 오랜 습성이 문밖을 나서면
뒤꿈치를 밟고 오는 은밀한 발소리
세상의 무수한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서사라면
내 굽은 등은 어떤 생(生)의 부호일까
정처가 없어 도달한 곳은
완고한 돌담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이었다
어느 한여름의 폭우가 지나간 자리,
담벼락을 점령한 주황색 나팔들이
일제히 먼 공중을 향해 입술을 열고 있다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던 능소화 넝쿨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제 무게를 못 이겨
외려 아래를 향해 허리를 구부릴 때,
저 꽃들은 담장 안의 밀어를 훔쳐 듣던 배후였을까
내가 숨겨둔 골목의 어둠과
차마 발설하지 못한 생의 흉터들이
저 붉은 목덜미 아래로 우수수 흘러내린다
공중에 무거운 안부를 떨어뜨리며
가장 화려한 순간에 통째로 목을 꺾는 투신(投身),
바닥에 닿아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저 서늘한 미소가
허공에 지어놓은 짝사랑의 집 안으로
부서진 나의 그림자 하나 가만히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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