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담장 너머의 배후

by선비천사

죄의 무게를 재보려는 듯 외출은 늘 낮아진다

우울이라는 오랜 습성이 문밖을 나서면

뒤꿈치를 밟고 오는 은밀한 발소리


세상의 무수한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서사라면

내 굽은 등은 어떤 생(生)의 부호일까


정처가 없어 도달한 곳은

완고한 돌담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이었다


어느 한여름의 폭우가 지나간 자리,

담벼락을 점령한 주황색 나팔들이

일제히 먼 공중을 향해 입술을 열고 있다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던 능소화 넝쿨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제 무게를 못 이겨

외려 아래를 향해 허리를 구부릴 때,

저 꽃들은 담장 안의 밀어를 훔쳐 듣던 배후였을까


내가 숨겨둔 골목의 어둠과

차마 발설하지 못한 생의 흉터들이

저 붉은 목덜미 아래로 우수수 흘러내린다


공중에 무거운 안부를 떨어뜨리며

가장 화려한 순간에 통째로 목을 꺾는 투신(投身),

바닥에 닿아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저 서늘한 미소가

허공에 지어놓은 짝사랑의 집 안으로

부서진 나의 그림자 하나 가만히 들이고 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우리는 왜 파워포인트처럼 정렬되는가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12화명세서 뒤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