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넝쿨이 겹겹이 짠 그늘 아래
식어가는 찻잔 속 구름을 유람하였네.
새소리는 적막의 벽면을 간간이 두드리고
입안에 머문 찻잎의 향이 유난히 달아
세상의 모든 소란이 내 발치에서 잠든 줄 알았네.
그때, 낡은 정적을 입은 사내 하나
기우뚱한 오후의 그림자를 이끌고 다가왔네.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내 휴식의 밑바닥을 파헤쳤네.
뿌리 깊은 잡초의 목덜미를 쥐어뜯을 때마다
말끔해진 흙바닥 위로 낯선 속살이 드러나고
그가 쏟은 땀방울이 내 잔 속의 차보다 먼저 뜨거워졌네.
비로소 보았네.
내가 탐닉하던 서늘한 그늘은
누군가의 구부러진 등허리가 간신히 버텨낸 둑이었다는 것을.
차마 삼키지 못한 찻물이
목구멍 끝에서 돌처럼 굳어갈 때,
나는 훔쳐 온 평화를 들킨 아이처럼
그늘의 바깥, 뙤약볕의 중심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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