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 이야기를 전하는 자 -33-

때로는 비극이 괴담을 낳는다 (1)

by이사금

#033화 때로는 비극이 괴담을 낳는다 (1)




25.


- 이상해. 여기에서 나갈 수가 없어.

연지는 언제 자신이 눈을 뜬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는 것만을 인지했다. 연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예전보다 새하얀 벽이었다.


예전의 기억이 어땠는지는 모르며 과거에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더 새하얗고 깨끗한 것은 확실했다.

연지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여기서 깨어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연지는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켰고 조금씩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에 크게 힘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그건 신기한 일이었다.


- 내가 언제 밥을 먹었더라?


식사를 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허기는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몸에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돌지 않았고 마치 마른 고목처럼 몸 안이 텅텅 빈 것 같았다.


연지는 구름이나 바람처럼 주변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연지가 본 적 없던 새하얀 벽, 그리고 문이 있었다. 문 역시 깨끗한 상태였지만 벽보다는 색깔이 진하고 푸르렀다. 그리고 그 촉감이 매우 단단하고 차가워 보였다. 예전에 연지가 살던 곳에는 이런 문이 없었다. 연지는 손을 둥글게 말고 톡톡 문을 두드렸다.


문은 매우 단단한 재질이었지만 손은 아프지 않았다. 마치 얼음장을 만진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연지의 손을 타고 올라왔을 뿐이다.


- 안에 아무도 없는 건가?


연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힘을 써서 그것을 돌려봤지만 이상할 정도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그 문을 포기하고 다른 문 앞으로 몸을 옮겼다.


아까와 똑같이 문을 두드리고 손잡이를 돌렸지만 역시 미동도 없었다. 역시 그 문 안에도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 여기에 나 말고 사람은 없는 건가?


연지는 쭉 이어진 길을 쳐다보았다. 저 끝에서 은은하게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그 빛은 자연적인 그것과는 달랐다. 어딘가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났기에 연지는 자기도 모르게 무서워졌다.


“저기요! 여기 누구 없어요?”


연지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통로 안에서 연지의 목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뭔가 반응이 없다.


연지는 왠지 실망스럽기도 하고 조바심도 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처음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을 때 연지 앞에 늘어진 통로는 매우 길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연지가 움직이자 생각보다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내 연지가 길의 끝부분에 닿았다.


은은한 불빛이 도는 그 자리는 이상하게 섬뜩해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길을 확인하기 위해선 그래도 그곳을 지나야 한다.

연지는 공포를 억누르고 그 빛 아래를 지나갔다. 그 빛 아래를 지나자 긴 계단이 보였다. 한쪽 계단은 위로 이어져 있었고 다른 계단은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 끝이 한없이 어두워 보여서 그 끝에 무언가가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여기서 혼자 버티는 것이 싫었던 연지는 어느 계단을 택할까 망설이다가 아래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때였다.


막 계단 아래로 발을 옮기려던 연지는 더 아래쪽을 향한 계단에서 자신을 훔쳐보는 것 같은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계단을 막 내려가려던 연지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지만 그림자의 크기가 자신의 반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라는 것을 깨닫고 어느 정도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후다닥 도망가는 그림자를 쫓았다. 그 그림자를 쫓아가면서 연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어린아이였다.


“얘-! 거기 서!”


연지가 소리 높여 아이를 불렀다. 연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이가 뒤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묘하게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아이와 여자 하나가 건물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소리는 요란스럽지 않았다.

계단 아래를 뛰어 내려가자 아까 연지가 있었던 곳처럼 기다란 통로가 죽 이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연지는 아이가 도망갈까 봐 이번에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 나서 얼굴을 조금씩 내밀고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살폈다.


- 아! 저기 있다!


분명 아까 그 아이인 것이 틀림없다. 아이가 저기 복도 끄트머리에서 숨을 고르는지 몸을 웅크리고 등은 연지를 향한 채 앉아 있었다. 몸은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서.


연지가 몸을 조금 더 내밀자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폐쇄된 곳에서 사람이 소리를 쳤을 때 공기가 울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


연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살폈다.


아까 분명 사람이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저 앞에 앉아 있는 아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미동도 없이 여전히 연지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적어도 아이가 지른 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착각한 거라고 생각한 연지는 조심스레 아이의 뒤로 다가갔다.

이전 04화기담 : 이야기를 전하는 자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