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슬롯라는 이 나라에선 무임승차하면 큰일 납니다.
바르게 행동한 사람에게 더 잘해주는 시스템.
사실 핀란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는 편이다. 국민은 기본적으로 슬롯 시스템을 믿고, 높은 세율에도 큰 불만은 없다.
국가도 그렇지만, 타인도 또한 기본적으로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핀란드 사람들이 더 뛰어난 인격을 지녔거나 좋은 국민성을 지닌 민족이라서가 아니라고 한다.
여러 연구나 기사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진실되고 바르게 행동한 사람에게 더 보상을 해주는 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이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
손쉽게(?) 무임승차하는 사람들.
나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지하철 무임승차하는 걸 종종 목격했다.
지하철 개찰구 아래로 기어서 통과하는 사람을 봤어도, 나도 그렇고 주변의 누구도 그 사람을 막지 않았다.
말리려 했다가는 괜한 시비가 걸려 크게 싸움이 나거나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니까 조용히 피하게 됐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하철 시스템은 일단 무임승차에 성공하기만 하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편이다.
잠시 동안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개찰구를 통과만 하면 되는 그런 시스템.
그래서 이 시스템은 무임승차를 막지 못하고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지하철에서 카드 안 찍고 그냥 통과하기 (이 나라에서는 정상)
핀란드 헬싱키에서 지하철을 처음 탔을 때,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지하철 정기권 티켓을 구매한 뒤,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이었는데 핀란드인 친구가 “그냥 통과해 가면 된다”고 했다.
검표하는 곳도, 개찰구도 없었다.
그런데, 헬싱키의 지하철이나 트램에서는 언제 어디서 갑자기 보안요원(a.k.a. 시큐리티)이 나타나서 표를 검사할지 모른다.
갑자기 여러 명의 시큐리티가 전동차 안으로 들이닥치면 모두 조용히 검표를 했고, 전동차가 멈춰서서 시간이 지체되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 중, 꼭 한 두명은 무임승차가 발각되어서 벌금을 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열차가 안 오는 나라.
부끄러운 얘기지만 오래전(이미 법적 시효는 한참 지났다) 나도 헬싱키에서 무임승차를 한 적이 있다.
그때의 심정은 정말 등골이 서늘해지고 오싹해서, 두 번 다시는 무임승차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11월 쯤, 눈이 내리기 시작한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1시간 뒤 쯤에는 헬싱키 중앙역에서 미리 예매한 기차편을 타야했는데, 그 전에 먼저 근교 열차(Lähijuna 전철이랑 비슷한 모습에 헬싱키 근교를 주로 다니는 열차)를 타고 B존에 위치한 친구네 집에 맡겨놓은 내 짐도 찾아와야 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았지만, 근교 열차만 제시간에 온다면 문제 없었다.
그런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내가 타야하는 근교 열차는 연착되어 오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경위 (=일종의 해명)
A 존: 헬싱키 도심 중심부
B 존: 헬싱키 외곽 및 에스푸 & 반타의 주요 지역
C 존: 헬싱키 반타 공항을 포함한 외곽 지역
D 존: 가장 바깥쪽 외곽 도시들
당시에 나는 헬싱키에서만 이동할 수 있는 A-B존 대중교통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
헬싱키 중앙역에서 북동쪽방향 B존에 있는 친구 집에 가려는데, 하필 내가 타야 할 반시계 방향 열차가 기약 없이 연착됐다. 이대로 가다간 예매한 기차까지 놓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시계 방향 열차를 타고 공항(C존)을 거쳐서 친구네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공항 가까이에 왔을 때 아차 싶었다.
시계 방향 노선을 타면, 공항을 통과해 가야하는데 내 티켓으로는 C존(공항 쪽)에 가면 안 되잖아?
그래서 공항 부근을 지나는 약 10분 동안 의도치 않은 무임승차를 하게 됐다.
1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잠깐 동안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
언제 갑자기 시큐리티가 들이닥칠지 몰라 너무 겁이 났다.
다행히도 친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신뢰받는 상황에서 신뢰를 깨는 것 = 압박감
모르고 무임승차를 한거였지만, 그렇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임승차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감시가 삼엄할 수록 사람들은 '안 걸리면 장땡'이라는 식의 꼼수를 부리기 쉬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감시하지 않고 사람을 믿어주는 공간에서는 규칙위반이 만드는 모든 압박감도 스스로 짊어지게 되는데... 이건 결코 편치 않은 감정이다.
오래전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경험도 비슷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컨닝을 작당모의하는 아이들을 봤다.
그런데 그저 조용히 넘어갔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선생님께 고자질 해봤자 선생님은 나에게 따져 묻거나 증거를 요구할 테고, 나 혼자서 작당모의팀 여럿을 모두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제보해봤자 그냥 긁어부스럼만 만들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감독관없이 무감독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정말로 선생님 한 명 없이 진행되었고, 자연스레 학생들은 모두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었다.
그리고 시험이 모두 끝나면, 모든 학생들에게 시험시간에 있던 일에 대해 제보할 기회가 주어졌다.
시험시간에 교실 앞 TV를 켜며 장난을 쳤던 같은 반 아이 한 명은 결국 교내봉사 처벌을 받았다.
물론, 핀란드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당장 한국에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인구밀도가 낮은 핀란드니까 시큐리티도 일일이 검표할 수 있지만, 만원 지하철이 흔한 서울 지하철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운영하는 나라가 존재하고, 신뢰가 바탕이 된 슬롯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심리로 어떻게 헹동하는지에 참고가 되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