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선생님이라고 해서 모든 음악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하는 비유가 있다.
"체육선생님이라고 아이스하키, 스키점프, 야구, 체조, 사격, 등등을 다 잘하진 않을 걸요?"
음악선생님이면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기타도 치고, 국악도 알고, 지휘도 하고, 악보도 척척 읽고, 오케스트라도 당연히 지도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음악이라는 세계는 생각보다 넓고, 한 사람이 평생을 파고들어도 다 만져볼 수 없는 방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음악선생님들이 은근히 어려워하는 업무가 있다.
학생오케스트라 지도다.
악기를 조금 안다고 해서 오케스트라를 지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케스트라는 한 명의 연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숨이 모여 움직이는 생물에 가깝다. 바이올린이 들어와야 할 때와 클라리넷이 물러나야 할 때, 트럼펫이 조금만 더 참아야 하는 순간과 타악기가 전체를 끌어올려야 하는 지점을 알아야 한다. 악보 위에 음표는 가지런히 놓여 있지만, 실제 연습실에서는 그 음표들이 각자 다른 속도로 뛰쳐나온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지휘다.
지휘봉을 든다는 것은 그저 박자를 젓는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지금부터 나를 보고 함께 움직여달라”고 말하는 일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몸으로 그렇게 선언하는 일이다. 또 음대생이라고 해서 모두 지휘를 해본 것은 아니다. 특히 기악 전공이 아니면 오케스트라를 객석에서 본 것이 전부인 경우도 많다. 무대 위에서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호흡하고, 어떻게 삐걱거리며, 어떻게 다시 맞춰지는지 몸으로 겪어보지 않으면 그 조직의 원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도 지휘는 늘 미지의 영역이었다.
물론 나는 플루트를 전공했고, 오케스트라 안에서 연주해본 경험이 있었다. 지휘자를 보며 숨을 들이마시고, 손끝 하나에 따라 들어가고 빠지는 감각을 몸으로 배운 적은 있었다. 하지만 보는 것과 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객석에서 지휘자를 보는 것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지휘자를 올려다보는 것과, 직접 지휘대 위에 서는 것은 모두 다른 세계였다. 첫 번째는 감상이고, 두 번째는 순응이며, 세 번째는 바카라임이었다.
공립학교 첫 발령지에는 학생오케스트라가 있었다.
나중에 교장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학교에서는 도교육청에 특별히 요청을 했다고 한다. 남고이니 가능하면 남자 음악교사가 오면 좋겠고, 오케스트라를 지도해야 하니 기악 전공이면 더 좋겠다고. 말은 간단하지만 그 조건은 생각보다 희귀했다. 남자 음악교사에, 기악 전공. 지금도 흔하지 않은 조합인데, 당시에는 더했다. 나도 거의 10년 가까이 없던 조합이었다고 들었다.
마침 그해 내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학교로 발령받았다. 운명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어떤 자리는 사람을 골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학교의 오케스트라는 내 첫 발령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가장 무거운 악기였다.
그 오케스트라는 창단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단체였다. 과거에도 학교에 오케스트라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선후배 사이에 불미스러운 폭력 사건이 있었고, 그 일로 오케스트라는 해체되었다고 했다. 음악은 아름다워야 하지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늘 아름답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흐른 뒤, 학교는 다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재창단이었다.
그러니 잘 정착된 단체는 아니었다. 오랜 전통과 탄탄한 시스템이 있는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이제 막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아이 같았다. 악기들은 있었지만 정돈되지 않았고, 단원들은 있었지만 방향이 뚜렷하지 않았다. 연습실에는 가능성과 어수선함이 함께 떠다녔다.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모두 음악을 사랑해서 모인 것은 아니구나.
물론 악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었다. 무대에 서보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은 오케스트라를 일종의 피난처처럼 생각했다. 그 시절 학교는 야간자율학습이 사실상 필수인 분위기였다. 학교는 외진 곳에 있었고, 스쿨버스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하교했다. 그러니 저녁 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으려면 어딘가에 있어야 했다. 그 어딘가가 오케스트라였다.
“너는 왜 오케스트라 들어왔어?”
처음 몇몇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냥요.”
“악기 하고 싶어서?”
“그것도 있고요.”
“또?”
아이는 잠깐 웃더니 작게 말했다.
“야자 안 해도 되잖아요.”
솔직했다. 너무 솔직해서 웃음이 나왔다. 교사 입장에서는 조금 허탈한 대답이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공부하기 싫은 저녁, 집에 갈 버스는 아직 없고,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면 음악실은 나름 괜찮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전에 이야기했던 난타 동아리 ‘드림동아리’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몇몇 분들은 다소 거친 표현으로 그런 아이들을 두고 ‘폭탄처리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생활지도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아이들이 동아리로 흘러들어온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조금 달랐다.
그 아이들은 문제아라기보다 방향을 잃은 아이들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아직 자기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들. 무기력해 보였지만,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불이 붙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악기 연주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악기는 정직하다. 연습한 만큼 소리가 조금씩 달라진다. 어제는 삑사리가 나던 음이 오늘은 조금 덜 흔들리고, 지난주에는 끝까지 불지 못하던 프레이즈가 이번 주에는 마지막 음까지 이어진다. 그 작은 향상의 경험은 생각보다 강하다. 공부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내가 하면 되는구나”의 감각을 악기는 비교적 선명하게 돌려준다.
그래서 나는 매일 저녁 남았다.
아이들과 악기를 잡고 씨름했다. 바이올린 활 잡는 손을 봐주고, 플루트 소리를 잡아주고, 클라리넷 리드를 확인하고, 트럼펫 소리가 너무 튀면 조금만 참아보자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매일 지도하려면 방과후 수업으로 개설해 수당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임교사였던 나는 그런 행정적 계산을 잘 몰랐다. 그냥 남아서 했다. 초과근무 수당이 전부였다. 한 시간에 만 원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 대학 시절 개인 레슨을 하면 보통 한 시간에 3만 원 정도를 받았으니, 계산만 놓고 보면 바보같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초임의 교사 생활에는 계산이 전부가 아닌 시간들이 있다.
작은 돈을 받고 큰 시간을 내어주는 대신, 생각보다 큰 것을 얻는 순간이 있다. 물론 그때의 나는 그걸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냥 아이들이 조금씩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음악실에 불이 켜져 있고, 창밖이 어두워지고, 아이들이 악기를 붙잡고 있는 저녁의 풍경이 좋았다.
문제는 음악실 뒤였다.
우리 학교에는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한 반에 절반 이상은 피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학교 뒤에는 산이 있었다. 그래서 늘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실내 흡연이 엄격히 금지되던 시기였고, 교내 흡연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비공식적인 흡연 장소를 찾아냈다.
음악실 뒤.
아이들은 줄여서 ‘음뒤’라고 불렀다.
음악실 뒤편은 학교의 그림자 같은 공간이었다. 교실의 소음은 닿지 않고, 교무실의 시선도 잘 미치지 않는 곳. 아이들은 그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비흡연자인 나에게 그 냄새는 거의 산업재해급이었다. 문을 열면 담배 연기가 느릿하게 밀려 들어왔고, 음악실 안의 악보와 보면대 사이로 냄새가 배어들었다. 플루트 소리보다 담배 냄새가 먼저 나를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나는 오케스트라 아이들에게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케스트라 하고 싶으면 담배는 안 된다.”
아이들은 처음에 웃었다.
“선생님, 너무 빡센데요.”
“빡센 게 아니라 기본이야. 악기 하는 애가 담배 피우면 소리도 망가지고, 몸도 망가지고, 무엇보다 약속을 어기는 거야.”
“걸리면 어떻게 돼요?”
“잘라야지.”
그 말을 정말로 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들려야 했다. 실제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아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변명했다. 친구가 피운 거다, 옆에만 있었다, 냄새가 밴 거다. 아이들의 변명은 늘 창의적이었다. 하지만 몇 번은 정말 자르려고 했다. 그제야 아이들이 조금 긴장했다.
신기한 것은, 진짜로 줄이려는 아이들이 보였다는 점이다.
완전히 끊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오케스트라 안에서는 노력하려는 모습이 있었다. 연습 전 담배 냄새가 나는지 서로 확인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나 오늘 안 폈어요”라고 먼저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작은 변화가 고마웠다. 아이들이 완벽해져서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간식도 많이 사줬다. 연습이 끝나면 빵을 나누어주고, 음료수를 사주고, 가끔은 치킨이나 피자 같은 것을 시켜 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출이 꽤 있었을 텐데, 그때는 크게 아깝지 않았다. 먹을 것을 앞에 둔 아이들은 조금 순해졌다. 방금 전까지 악보를 못 읽겠다고 투덜거리던 아이도 빵 하나를 들고 있으면 표정이 풀렸다.
“선생님, 오늘은 뭐 사줘요?”
“연습 똑바로 하면 생각해보고.”
“그럼 저 오늘 진짜 열심히 합니다.”
“그 말 지난주에도 들었는데?”
“이번엔 진짜예요.”
아이들의 ‘진짜’는 자주 갱신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 말 속에는 그래도 오늘은 해보겠다는 작은 의지가 있었다.
실력은 좀처럼 빠르게 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혼자 악기 하나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박자를 놓치고, 누군가는 조율이 맞지 않았고, 누군가는 악보를 잃어버렸다. 지휘대 위에 서면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졌다. 색소폰은 앞서가고, 금관은 뒤에서 늦게 들어오고, 타악기는 너무 자신감 있게 틀렸다. 나는 지휘봉을 들고 서서 생각했다.
‘이 거대한 배를 내가 몰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달라졌다. 서울에서 열리는 관악 축제에도 데려갔고, 도내에서 열리는 여러 발표회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 다른 학교 아이들의 연주를 듣는 일, 자신들이 연습한 곡을 무대에서 보여주는 일, 그리고 끝나고 맛있는 것을 먹는 일. 그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꽤 큰 자극이 되었다.
“선생님,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어요?”
어떤 아이가 다른 학교 연주를 듣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처럼 하면 안 되고.”
아이는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계속 하면 가능하지.”
그 말은 아이에게 한 말이기도 했지만, 나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계속 하면 가능하다. 오케스트라에도,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었다.
6개월쯤 지나자 조금씩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여전히 삐걱거렸고, 여전히 엉성했지만, 처음의 어수선함과는 달랐다. 아이들은 악기를 챙겼고, 연습 시간에 늦으면 미안해했고, 무대에 설 때 긴장하기 시작했다. 긴장한다는 것은 중요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휘는 여전히 어려웠다.
나는 지휘대 위에서 자주 작아졌다. 플루트를 들고 앉아 있을 때는 내가 내 소리만 바카라임지면 되었다. 하지만 지휘봉을 들면 모든 소리가 내 바카라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틀리면 내가 놓친 것 같고, 전체가 무너지면 내가 중심을 못 잡은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며 버텨야 했다.
첫 학교에서 학생오케스트라를 2년 지도했다. 그리고 다음 학교에서도 4년을 더 지도했다. 모두 합치면 6년이다. 그 6년 동안 우리는 대회도 나갔고, 정기연주회도 했고, 크고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몇몇 아이들과는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어떤 아이는 악기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리를 찾았고, 어떤 아이는 무대 위에서 평소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 역시 그 아이들을 통해 교사로 많이 자랐다.
나중에는 내가 명예기자로 활동하던 교육부 월간지에 학생오케스트라 이야기가 네 면이나 실리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꽤 알려진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음악실 뒤에서 담배 냄새와 싸우며 시작했던 오케스트라가, 어느 순간 다른 학교의 부러움을 받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한 번에 다 풀어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학생오케스트라는 내 교직생활에서 아주 긴 악장 같은 존재다. 첫 장은 어수선한 조율 소리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음을 내고 있었고, 나는 서툰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야자를 피하려고 왔고, 누군가는 담배를 줄이겠다고 약속했으며, 누군가는 악기보다 간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음악은 조금씩 자랐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 나는 오케스트라가 없는 학교에서 7년째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홀가분했다. 저녁마다 남아 악기를 지도하지 않아도 되고, 연주회 준비에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되고, 악기 수리와 강사 섭외와 버스 예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가끔 그 시절이 그립다. 특히 멋지게 연주하는 다른 학교의 오케스트라를 보면 더 그렇다.
이상한 일이다. 힘들었던 일은 지나고 나면 자주 그리움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
가끔은 내 안에서 지휘자와 연주자가 서로 다툰다. 연주자는 조용히 자기 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플루트를 들고 내 호흡만 바카라임지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지휘자는 여전히 사람들을 모아 하나의 소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엉성한 아이들을 데리고, 삐걱거리는 첫 합주를 지나, 어느 순간 모두가 같은 박자로 숨을 쉬는 그 장면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더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이야기를 천천히 써 내려가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연주자의 미련인지,
지휘자의 그리움인지, 아니면 학생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던 젊은 교사의 오래된 열정인지.
그 시작은 음악실 뒤였다.
담배 냄새가 스며들던 그 좁은 공간, 어두워진 운동장, 저녁마다 불이 켜지던 음악실, 그리고 악기를 품에 안고 멋쩍게 서 있던 아이들.
그곳에서 나의 첫 오케스트라 지휘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