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바의 자리

윈드오케스트라는 숨으로 움직인다.


현악기의 활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술과 혀와 폐에서 시작되는 음악이다. 플루트는 공기를 가늘게 베어내고, 클라리넷과 색소폰은 리드를 떨게 하며 소리를 만든다. 트럼펫과 트롬본, 호른은 입술의 진동으로 금속관 전체를 울린다. 타악기는 그 모든 호흡 위에 박자를 세우고, 때로는 음악 전체를 앞으로 밀어낸다. 윈드오케스트라의 소리는 그래서 조금 더 직접적이다. 몸 안에 있던 숨이 악기를 지나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음악은 곧 사람의 기운이 된다.


아이들은 대체로 눈에 잘 띄는 악기를 좋아했다.


플루트처럼 반짝이고 가벼운 악기, 색소폰처럼 멋있어 보이는 악기, 트럼펫처럼 몇 마디만 불어도 모두가 돌아보는 악기. 타악기도 인기가 많았다. 드럼 스틱을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조금 달라 보였다. 무대에서 시선이 가고, 소리가 잘 들리고, 친구들이 알아봐 주는 악기들 앞에는 늘 관심이 모였다.


하지만 윈드오케스트라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도 있다.


무대의 뒤쪽, 금관 파트의 가장 낮은 곳. 선율을 길게 끌고 가는 일은 많지 않지만, 없으면 전체 소리가 금세 가벼워지는 자리. 나는 그 자리를 생각할 때마다 튜바를 떠올린다.


튜바는 크고 무겁다. 금빛으로 반짝이지만 이상하게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다. 트럼펫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르지도 않고, 플루트처럼 높은 곳에서 빛나지도 않는다. 색소폰처럼 세련된 이미지를 갖고 있지도 않다. 무대 뒤편에 앉아 낮은 음을 길게 받치고, 때로는 단순한 박자와 근음을 반복한다. 악보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


하지만 튜바가 빠진 윈드오케스트라는 금세 티가 난다. 소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래가 비어 있다. 높은 악기들이 아무리 열심히 불어도 중심이 가볍다. 베이스가 없는 합주는 바닥이 약한 집처럼 흔들린다. 튜바는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없으면 가장 먼저 허전해지는 악기다.


내 첫 발령 학교의 윈드오케스트라에도 튜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튜바 뒤에는 성호가 있었다. 성호는 가명이다.


성호는 다문화가정의 아이였다.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은 서류 위에서는 참 간단하다. 몇 글자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아이가 매일 통과해야 하는 복잡한 풍경이 들어 있다. 집에서 쓰는 언어와 학교에서 쓰는 언어가 다를 수 있고, 가족의 문화와 친구들의 문화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여도, 아이는 자신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성호가 그랬다.

성호는 학교에 잘 섞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지나쳐버리기 쉬운 아이였다.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늘 조금 뒤에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 있어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크게 웃는 일이 드물었고, 먼저 말을 거는 일도 많지 않았다.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처음에는 무기력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기력이라는 말은 아이를 너무 쉽게 설명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사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을 때가 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지 않기 위해, 나섰다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실패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마음을 아끼는 아이들이 있다. 성호의 조용함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방어였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악기를 정하던 날, 아이들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플루트, 색소폰, 트럼펫, 타악기처럼 눈에 띄는 악기에 관심이 몰렸다. 반면 튜바 앞에서는 아이들이 머뭇거렸다. 악기 자체가 너무 컸다. 케이스만 봐도 부담스러웠고, 악기를 꺼내놓으면 아이들은 장난처럼 웃었다. 누군가는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도 되겠다고 했고, 누군가는 들고 다니다가 허리 나가겠다고 했다.


성호는 특별히 하고 싶은 악기가 없다고 했다.

그 대답은 성호다웠다.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무엇도 자신 있게 선택하지 못하겠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아이에게 튜바를 맡겼다.


처음부터 교육적인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윈드오케스트라에는 튜바가 필요했고, 누군가는 그 악기를 맡아야 했다. 그런데 성호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튜바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나서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 조용하지만 전체를 받치는 역할.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에게, 오히려 가장 낮고 깊은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맡겨보고 싶었다.


처음 성호가 튜바를 잡았을 때의 모습이 기억난다. 악기가 아이보다 더 커 보였다. 튜바를 안고 앉은 성호는 마치 악기 뒤에 몸을 숨긴 것 같았다.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숨을 불어넣었지만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금관악기는 쉽게 소리를 내주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면 바로 소리가 나는 악기가 아니다. 입술이 떨려야 하고, 숨이 깊어야 하고, 몸 전체가 관을 울릴 만큼 버텨줘야 한다. 특히 튜바는 더 그렇다. 짧고 얕은 숨으로는 어림없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공기를 끌어올려야 한다. 성호에게는 그 점이 오히려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악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악기, 실패해도 같은 자리에서 반복할 수 있는 악기.


성호는 요란하게 노력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연습 시간에 빠지지 않고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잘하든 못하든, 소리가 나든 나지 않든, 튜바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자체가 성호에게는 작은 변화였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소리가 났을 때, 음악실 바닥이 낮게 울렸다.

아름다운 소리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둔탁했고, 짧았고, 음정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튜바 소리였다. 성호의 몸을 통과한 숨이 마우스피스를 지나 금속관 안에서 둥글게 돌아 나왔다. 그 낮은 울림이 음악실 바닥을 타고 퍼졌다.


그 순간 성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다른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자신이 낸 소리를 스스로도 신기해하는 얼굴. “내가 방금 무언가를 해냈구나” 하는 표정.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소리를 들은 순간이었다.


그 뒤로 성호는 조금씩 달라졌다.

물론 드라마처럼 하루아침에 밝아진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갑자기 어울리게 된 것도 아니고, 학교생활이 순식간에 적극적으로 바뀐 것도 아니었다. 실제 변화는 훨씬 느리고 조용했다. 하지만 분명했다. 연습 시간에 튜바를 먼저 꺼내놓는 날이 생겼다. 악보를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합주 중 자기 차례가 오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악기를 입에 댔다. 소리가 잘 나지 않는 날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 중 중요한 것은 때로 기다리는 일이다. 아이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보다 조금 먼저 알아차리고, 그 변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는 일. 성호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 아이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튜바는 원래 서두르는 악기가 아니었다. 낮은 음은 깊은 숨을 기다린다. 성호 역시 자기 안에서 숨이 차오를 시간이 필요했다.


윈드오케스트라 합주를 하다 보면 튜바의 존재는 더 분명해진다. 목관악기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트럼펫과 트롬본이 힘 있게 앞으로 나아가고, 타악기가 박자를 밀어붙이는 순간에도 튜바는 아래에서 중심을 잡는다. 때로는 너무 단순해서 아이들이 지루해할 만한 음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반복이 있어야 음악이 버틴다.


어느 날 일부러 튜바 없이 연주를 해본 적이 있다. 곡은 계속 흘러갔지만 아래가 비었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은 가볍게 떠올랐고, 트럼펫 소리는 앞으로 나가는데 중심이 없었다. 다시 성호의 튜바가 들어오자 전체 소리가 조금 단단해졌다. 아이들도 그 차이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성호는 그 과정에서 자기 자리를 배웠던 것 같다.

무대 앞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소리가 분명히 필요하다는 것. 자기 소리가 작게 느껴져도, 그 소리가 없으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악기를 배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존재를 배우는 일이었다.


나는 성호를 보며 자주 생각했다.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대개 ‘문제’로 먼저 불린다. 생활지도가 필요한 아이, 상담이 필요한 아이, 관심이 필요한 아이. 물론 그런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들만으로 아이를 보면, 아이 안에 있는 가능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성호는 문제라기보다 아직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아이였다. 그리고 윈드오케스트라 안에서, 튜바라는 악기를 통해 아주 느리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첫 무대를 준비하던 시기의 음악실이 떠오른다.

해가 지면 창문 밖 벤치는 어두워졌고, 음악실 안에는 형광등 불빛만 환했다. 보면대 위의 악보는 여러 번 넘긴 탓에 가장자리가 구겨졌다. 클라리넷은 리드 상태에 따라 소리가 들쭉날쭉했고, 플루트는 호흡이 짧아 프레이즈 끝이 자주 사라졌다. 트럼펫은 조금만 자신감이 붙으면 전체를 뚫고 나왔고, 트롬본은 슬라이드 위치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타악기는 꼭 중요한 순간에 마음이 앞섰다.


그 어수선한 소리들 사이에서 성호는 뒤쪽에 앉아 있었다. 큰 악기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낮은 음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숨을 들이마시고 소리를 냈다. 완벽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점이 중요했다. 예전의 성호라면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예 시도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아이는 무대 위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성호가 크게 주목받은 것은 아니었다. 관객들은 아마 높은 선율을 기억했을 것이고, 힘 있게 울리던 금관의 큰 소리나 타악기의 박진감을 더 선명하게 떠올렸을 것이다. 튜바는 여전히 뒤쪽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음악의 바닥을 붙들고 있던 아이가 누구였는지.


성호가 튜바를 내려놓던 순간, 나는 그 아이가 조금 자란 것처럼 보였다. 키가 커졌다는 뜻이 아니다.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자기 몫을 끝까지 해낸 사람에게서만 보이는 작은 단단함이 있었다. 그 조용한 변화가 나는 참 좋았다.


교사는 아이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는 사람이 아닐 때가 많다. 영화처럼 한마디로 아이를 깨우고, 한 번의 무대로 모든 것을 뒤집는 일은 드물다. 실제 교육은 훨씬 느리고 자잘하다. 악기를 꺼내는 손길이 전보다 조금 빨라지는 것, 연습 시간에 자리를 지키는 것, 예전 같으면 포기했을 순간에 한 번 더 해보는 것, 자기 소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 그런 작고 조용한 변화들이 쌓여 아이를 움직인다.


성호가 그랬다.

튜바는 성호에게 화려한 날개를 달아준 악기가 아니었다. 대신 발밑에 작은 바닥을 만들어준 악기였다. 흔들리던 아이가 잠시 기대 설 수 있는 자리. 자신이 여기 있어도 된다고 느낄 수 있는 자리. 낮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자리.


나는 그 아이를 통해 윈드오케스트라를 다시 배웠다. 윈드오케스트라는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 멋진 연주를 만드는 곳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아이들이 각자의 숨으로 소리를 내보는 곳이었다. 어떤 아이는 앞에서 빛나고, 어떤 아이는 뒤에서 받친다. 어떤 아이는 빠르게 성장하고, 어떤 아이는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 모든 숨이 함께 있을 때 음악이 된다.


세월이 지나도 튜바를 보면 성호가 떠오른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로 학교에 잘 섞이지 못하던 모습, 말없이 뒤에 앉아 있던 얼굴, 처음으로 낮은 소리를 내고 조금 놀라던 표정, 무대가 끝난 뒤 튜바를 내려놓던 손. 그 모든 장면이 낮은 음처럼 내 안에 남아 있다.


튜바의 자리는 무대 뒤쪽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음악의 가장 아래에서 모두를 받치고 있었다.


성호도 그랬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이였다. 하지만 자기 자리를 찾고 나자, 그는 조용히 윈드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이 되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여전히 뒤쪽에 앉은 아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는 달랐다.

그 아이는 낮은 곳에서 자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전 25화음악실 뒤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